박영자 수필가

 “아! 영춘화가 피었네.”
베란다 밖을 무심히 바라보다 깜짝 놀랐다. 에어컨 박스 놓을 자리에 대신 심어 놓은 영춘화가 샛노란 꽃을 다문다문 피운 것이다. 엊그제만 해도 보지 못했는데 봄을 환영한다는 뜻의 영춘화(迎春化)이니 이제 정녕 봄이 온 것인가.
올 봄은 어느 계절보다도 더디게 온 듯하다. 연일 일교차가 10도 안팎을 기록하며 변덕스러운 봄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봄이 올듯 올듯 하면서도 다시 뒷걸음치기를 수없이 한 뒤에야 드디어 우리 집 창밖에 도착한 것이니 어찌 반갑지 않으랴. 베란다를 열고 쌀랑한 봄바람을 맞으며 꽃들과 눈 맞춤을 하자니 내 마음도 병아리 깃털처럼 노랗게 물이 든다. 영춘화 밑에는 심지도 않은 쇠별꽃들이 쌀 알 보다도 작은 흰 꽃을 흩어 놓았고 쥐똥나무 새 순이 뾰족뾰족 잎을 내밀었다.
베란다 안쪽에는 겨우내 꽃들의 릴레이가 이어졌다. 아젤리아, 보라별꽃, 약모밀, 자란, 베고니아, 가랑고에 등등 꽃들이 계절을 잊은 듯이 피고지고를 계속하니 심심치 않았다. 베란다 안에 사는 것들은 한 겨울에도 비닐하우스나 실내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일 테니 눈을 맞을 일도 없었고, 칼바람과 맞닥뜨릴 일도 없었다. 때맞춰 주는 물을 받아먹고 따뜻한 집안에 앉아 꽃을 피웠으니 밖에 사는 것들에 비하면 한결 수월했으리라.
하지만 밖에 서있던 영춘화는 22층 높새바람에 늘 흔들렸고 눈이 쌓이면 가지마다 소복소복 눈을 이고 서 있었지만 굳세게 버티어 온 것이 장하고, 꽃까지 피웠으니 얼마나 기특한가. 꽃샘추위는 또 얼마나 심했나. 햇살이 따사로운 듯하여 창을 열면 품속으로 파고드는 봄바람의 시샘이 얼마나 표독스러웠던가. 기온이 다시 영하로 떨어지고 눈발마저 날리는 날에는 애처롭기 까지 했지만 이 추위마저 겪어내야 진정 꽃을 피워낼 수 있다는 마음만 전하며 그저 바라만 볼 뿐 어쩔 수가 없었다.
꽃이 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꽃샘추위는 예부터 바람의 신(神)이 샘이 나서 꽃이 피지 못하도록 차가운 바람을 불게 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꽃이 피는 걸 시샘하는 추위’라니 우리 선조들은 꽃에게도 바람에게도 마음을 불어넣어 주었으니 꽤나 운치 있는 생각이요, 표현이 아닌가.
꽃샘추위는 꽃만 시샘하겠는가. 잎이 나오는 것도 시샘하는 추위라는 뜻에서 ‘잎샘추위’라고도 한다. ‘꽃샘잎샘 추위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는 속담이 있으니 그 위력이 만만치 않다. 아무리 꽃샘바람이 세다고 해도 봄은 틀림없이 오고야 만다. 칼바람이 아무리 매섭다 할지라도 소리 없이 도도하게 다가오는 봄을 결코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또 한 번 실감한다.
베란다 안에서 크는 화초를 성급한 마음에 서둘러 밖으로 내 놓으면 추위를 타서 기를 펴지 못하고 곧 시들어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밖에서 겨울을 보낸 영춘화는 그럴 염려가 없다. 겨울바람이 센 날일수록 꺾이지 않으려고 허리를 곧추세우며 이겨내고 내공을 쌓았으니 뿌리는 더욱더 깊은 곳으로 튼튼하게 뻗었을 것이다.
세상사에는 늘 꽃샘바람이 분다. 바람 잘 날 없는 것이 우리네 삶이다. 그런 것을 알면서도 사람은 시련 앞에 정면으로 도전하기를 겁낸다. 어떻게 해서라도 어려운 일, 힘 드는 일을 회피하고 싶어 안달이다.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인내한 사람만이 꽃을 피울 수 있다는 이치를 모르지 않으면서도 실행은 쉽지 않다. 말없이 시련을 견디고 꽃을 피우며 잎을 피우는 자연 앞에서 다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꽃샘추위는 자연이 인간에게 해마다 일깨워주는 성장통이요, 시련극복을 위한 가르침이다. 어렵고 힘겨운 때가 지나면 봄날은 오게 마련이다. 어려운 일도 힘든 일도 언젠가는 지나가리니. 인생의 꽃샘추위를 겁내지 말고 가슴을 한껏 펴고 희망의 깃대를 세워 보자.
오늘이 경칩과 청명 사이에 드는 춘분(春分)이다. 태양이 남에서 북으로 가면서 춘분점을 지나 태양의 중심이 적도 위를 바로 비추어서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
기온이 많이 올라가 얼었던 땅이 풀리고 농부들의 손길이 분주해지면서 논밭에 뿌릴 씨앗 종자를 골라놓고, 물꼬를 손질하는 등 농사를 시작할 준비를 하게 된다. 즉 한 해 농사를 시작하는 시발점이다. 하지만 ‘2월 바람에 김칫독 깨진다.’는 속담도 있으니 봄의 발자국처럼 조심조심 맞아들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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