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그 미래의 땅에 희망이…


사진1=남기천 진천고 교장.


사진2=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20대의 용사들은 이제 80대의 노병들이 됐다. 아디스아바바에 있는 참전 기념비 앞에서 이 노병들과 기념사진을 남겼다. (앞줄 중앙이 필자).



 

 

‘사랑의 점심나누기’ 켐페인을 펼치고 있는 동양일보와 월드비전은 1996년 이래 18년간 아프리카 에티오피아 한국전 참전용사돕기를 펼쳐오고 있다. 지난 2월 26일부터 3월 6일까지 현지 학교건립 모니터링을 위해 충북방문단의 일원으로 현지를 돌아보고 온 남기천 교장의 글을 3회에 걸쳐 싣는다. <편집자>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의 새벽 공기는 아주 상쾌했다. 오랜 시간을 견뎌야 했던 좁은 비행기 안에서의 답답함과 지루함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디스아바바는 분명 여명이 터오는 아침의 나라였다.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선 곳이었지만 분명 그곳은 내일의 문명사회 건설을 위하여 활기 넘치는 역동적인 곳이 틀림없었다.

중장비는 거의 보이지 않았지만 곳곳이 건설 현장이었다. 새벽 공기와는 달리 낮이 되자 온통 흙먼지가 도시를 뒤덮다시피 했다. 거리는 무질서했고 자동차는 대부분 중고로 아직도 유연 휘발유를 사용하고 있어 매연도 매우 심했다.

 ●보은의 자취를 찾아

우리 일행이 제일 먼저 찾은 곳은 한국전쟁 참전 용사회관이었다. 에티오피아는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나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1951년 5월 12일 6037명이라는 전투병을 파병했다.

당시 에티오피아는 유엔가입국으로 경제사정이 우리보다 훨씬 좋은 나라였으며, 참전군인들은 셀라시에 황제의 근위대인 정규사관학교 1기생으로 그 나라 최고의 엘리트들이었다.

1951년 당시 배를 타고 두 달이나 걸려 한국에 도착한 참전군인들은 강원도 철원-금화 -가평의 전선에서 모두 250여회의 전투에 참가했으며 참전용사 중 121명이 전사, 536명이 부상당했지만 단 한명의 포로도 남기지 않은 용맹한 부대였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귀국한 이들은 근위대 3인자인 멩기투스 소령의 쿠데타로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한국전에 참전했다는 이유로 박해를 받아 대부분 산간오지로 숨어들었다. 사회적인 신분이 모두 박탈된 것은 물론이었다. 공산정권 17년이 지난 1991년 자유민주정권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미 에티오피아의 정치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피폐해졌고 ‘세계 최빈국’의 오명이 붙게 됐다.

참전용사들의 신분도 복권이 되었으나 상당수 굶주림과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생존자들은 사회적 신분보장을 받았으나 가난과 질병의 고통을 이겨내기엔 역부족이었다.

현재 참전 군인들은 80대의 노인이 되어 생활력이 거의 없으며 현재 생존해 있는 노병들은 400여명 정도라고 전하고 있다. 이들은 에티오피아 수도 아디스아바바 변두리 지역에서 집단으로 모여 마을을 형성해 살고 있다.

이 마을은 셀라시에 황제 때 귀국병사들의 정착을 위해 정부가 마련해준 특별지역의 이름 그대로 ‘코리아 빌리지’로 불리고 있다. 참전 용사회장의 안내로 기념탑에 헌화와 참배하고 회관으로 돌아와 그간의 사정과 지난날을 회고하며 잠시 이야기꽃을 피웠다. 참전 용사회 회장은 “60년 전 젊어서 나라의 명령에 따라 아무 생각 없이 한국을 도우러 간 것뿐인데 60년이 지난 후 마치 돈 맡겨놓고 이자까지 쳐서 받는 느낌”이라며 “매우 감사하다”는 인사를 거듭했다.

특히 18년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찾아와 성금과 선물을 전하는 동양일보와 충청북도 도민들의 정성과 은혜는 잊을 수 없는 ‘감동적인 스토리’가 됐다고 전했다.

동양일보와 월드비전 충북지부는 이미 지난해부터 참전용사회관 옆 부지에 ‘충북홀’을 건립할 예정으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자국의 법률상 외국 자본을 들여 충북홀을 건립하는 것이 쉽게 허락되지 않아 김종근(충북 충주출신)에티오피아 주재 대사의 주선으로 기르마 기오르지스 대통령까지 면담하면서 조속한 신축공사 허가를 요청하였으며, 대통령도 흔쾌히 승낙하여 순조롭게 추진될 것으로 보인다.

참으로 위대한 대한민국,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자긍심을 갖게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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