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
침례신학대 교수
비 내린다. 잘 빗은 머리카락처럼 가지런히 하늘에서 물방울들이 땅으로 직하한다. 땅 속의 것들을 깨우고, 물관을 줄기차게 흐르며 식물들 말초마다 당도해 화안한 흐드러짐으로 즐거울 물의 생생력들. 지금 비는 반갑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이런 구절들을 습관처럼 읊조리면 빗물은 마음으로 스미는지. 과거를 헤집어 가며 있지도 않은 가로등 그늘의 어떤 밤을 소환해내 감상에 잡히게도 되는지. 그래서 비는 ‘추억을 말해주듯’ 내리는지.
봄은 늘 늦다. 기다리는 마음 때문. 꽃을 당도해야 할 기쁜 소식처럼 생각했다. 해서인지 잠잠하던 화분의 꽃나무에 꽃망울이 솟더니 가지들마다 꽃송이들을 흔연히 매달기 시작했다.
작고 여린 분홍 꽃들이 애잔하고 대견했다. 곱슬대는 머리카락 아래 웃을 때면 눈이 먼저 가늘어지는 이가 준 꽃나무 덕에 격려라도 들은 듯 마음이 그득해져왔다. 어제 일이다.
그제는 아이가 학교에서 다쳤다. 기별을 받고 가보니 피로 교복 블라우스 보이는 목부분이 칠갑인 채,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고만고만한 줄 알고 내 옷가지 어지간히 갖춰입는 동안도 아이는 울고 있던 거였다. 병원 응급실, 사진에는 빗장뼈 부러진 부분이 선명하게 박혀있고, 수술을 해야할 것 같다고 젊은 의사가 소견을 냈다.
그냥은 시일도 오래 걸리고, 붙기도 쉽지 않다니 이름도 처음 들어본 빗장뼈 부러진 영상이 갑자기 머리 속에 각인되며 공포가 밀려왔다.
운동장 한 쪽 축구골대 옆에 쇠줄이 있었고, 그 줄을 못보고 달렸다는데 하필 그 줄이 아이 목 높이여서 목을 압박하고 기도를 눌러 기절한 것이다.
그러면서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전속력으로 달리고 있었다니 쇠줄이 목에 더 깊이 박히지 않은 게 다행스런 일이었다.
그런데 수술을 해야 하다니 갑자기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염려하는 건지 뚜렷하지 않은 추상적 공포로 허덕였다. 수술을 해야 한다면 우선 병원을 집 가까운 데로 옮겨야 했다.
옮긴 병원은 바빠서 세 시간을 기다려도 외래 진료를 보기 어려울 것이라니, 응급실로 갔다. 먼저 병원에서 한 것과 똑같은 절차가 다시 반복되었다.
병원에서는 기다리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이 뭔가를 늘 기다려야 했다.
먼저 간 병원 응급실에서는 사진 찍기 위해 삼십분 이상, 진통제 맞기까지 이십 여분 이상을 기다렸는데, 옮긴 병원 응급실에서 진료를 받으러 한 시간여를 또 기다렸다.
허술한 나에 비해 아이는 야무져서 진정제 효과인지 제법 농담 비슷한 것도 하고, 다친 경위도 빠진 부분 부분 채워 넣으며 되려 어미를 안심시켰다.
의사가 어서 봐주기를 표정으로라도 재촉하고 싶어하면 괜찮다더니, 제 아버지가 도착하자 긴장을 풀고 침대 등받이를 세운 채 토막잠에 빠졌다.
비로소 나도 눈알이 빠질 듯한 안구건조가 새로워져 아이가 기대 잠든 침대에 머리를 대고 잠이 들었다.
오분은 되었을까, 잠은 달고 개운했다. 개운해졌어도 내가 할 일은 없었다. 할 일이 없어서 기도를 시작했다. 어미인 나, 그 아이를 낳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기도 밖에 없었다.
‘하나님, 나를 만드시고, 또 저 아이를 만드신 하나님. 아직 어린 아이이고, 목숨도 지켜주셨는데 수술을 안하고 뼈가 붙는데 까지 도와주시면 어떨까요. 그러시면 참 좋겠습니다.’
기도할 수 있는 것이 또 다행이었다. 잠에서 깬 아이도 개운한 얼굴이고 목의 무서운 상처도 한결 눈에 익어 덜 무서워졌다.
죽을 수도 있던 일이라고, 그런데 살아있다고 수술을 하는 일은 그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마음의 가닥이 잡혀가기 시작하는데, 수술은 안해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사진 찍느라 입었던 병원 옷을 제 옷으로 갈아입히러 창문 블라인드를 내리는데 아이가 ‘찬란한 햇살인거네’라고 중얼거렸다. 아이는 어깨에 배낭끈처럼 두툼한 붕대를 둘렀다.
이 비 그치면 꽃 피고 새 우는 바람이 또 불 것이고, 그러면 그동안 입었던 두터운 옷같은 익숙한 습관들 털고 일상들 새롭게 길들여 나갈 사랑이 또 자라나기도 할 것이다. 비 걷히고, 나타나는 찬란한 햇살같은 봄날, 아이는 또 붕대를 완전히 벗게 될 것이다.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는 말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