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 /수필가

  아파트에서 밤에 시가지의 야경(夜景)을 내려다보면 붉은색을 띈 십자가가 셀 수 없이 많이 보인다. 그만치 교회가 많다는 얘기다. 그렇게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세상이 정화되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혼탁해지고 있으니 이상하다는 의문을 품게 된다.
 
  부활절을 보내면서 십자가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십자가를 보는 마음은 고통스럽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고난의 역사 때문이다. 사형선고를 받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오르시는 예수님은 채찍에 맞고, 살이 찢겨 피를 흘리고, 기진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기를 세 번 반복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 사람의 생살에 대못을 박는 일은 참으로 끔찍하다 못해 처참하기 짝이 없다. 이런 진저리쳐지는 고통 속에 숨을 거두신 예수님이시기에 십자가는 공포요, 극한의 두려움이었다.
  “저의 하나님, 저의 하나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절규를 어찌 말로 다 표현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우리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예수님의 희생이 있었기에 부활이라는 기쁨도 있는 것이다. 그 십자가의 희생이 인간을 구원하는 숭고한 과정이며 은총의 도구로 우리를 감격하게 하는 징표가 아닌가. 더 이상 십자가는 고통과 두려움이 아닌, 사랑과 용서와 구원의  상징이 된 것이다. 십자가는 처음에는 공포요, 죽음이지만 나중에는 인류를 구원한 길이였고 하느님의 예정된 사랑의 길이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이 슬픔을 넘어 서서 기쁨과 승리가 된 것이다.

  의미 있는 영상을 본 일이 있다. 여러 사람이 십자가 하나씩을 어깨에 메고 먼 길을 가고 있었다. 십자가는 땅에 질질 끌려 무척 무거웠고 태양은 머리위에서 사정없이 내리 쬐어 땀이 비 오듯 했다. 너무 힘들다보니 그 중 한 사람이 꾀가 났다. 십자가의 긴 쪽 끝을 톱으로 좀 잘라내었다. 무게는 한 층 가벼워졌다. 한참을 걷다보니 또 힘에 부친다는 생각에 조금 더 잘라내었다. 그 사람은 훨씬 가벼워진 십자가를 메고 가면서
 '이렇게 가벼워졌는데 저 사람들은 왜 그냥 메고 가는 것일까?' 하며 참 바보 같고 미련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참을 더 걸어가니 깊은 계곡이 앞을 가로 막았다. 다른 사람들은 계곡의 이쪽과 저쪽에 십자가를 가로질러 놓고 그 위로 잘들 건너갔다. 하지만 십자가를 두 번이나 자른 사람은 길이가 짧아 계곡에 걸쳐 지지를 않았다. 주님께서 감당하라고 주신 십자가를 자르다보니 주님께서 원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더 갈 수가 없었다.

   우리의 사는 모습도 이와 같다. 누구나 자신이 감당해야 할 십자가가 있는 것이다. 삶의 여정에서 누구나 짊어지고 갈 짐이 있다. 그것은 가족일 수도 있고 직장일 수도 있으며 내가 지고 가야 할 의무요, 책임이며 사명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더 가볍고 쉬운 짐을 지고 편하게 갈 것인가 하는 유혹 앞에서 갈등하며 산다. 누구도 이 유혹 앞에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늘 감사하며 자기 십자가를 열심히 지기보다는 억울하다, 공평하지 못하다, 저울질하고 불평하며 살고 있다.
  
  인사 청문회를 보며 참으로 생각이 많아진다. 줄줄이 낙마하는 정치인들의 이력을 보면 자기 십자가를 성실하게 지기보다는 편법을 써서 편하게 살고자 가진 수단을 다 쓴 사람들이다. 병역기피, 세금포탈, 부동산 투기, 학위논문위조 등등 도덕 불감증이 도를 넘었다. 모두가 자기 십자가를 조금씩 잘라내어 가볍게 가고자 한 것이다. 결국 청문회라는 계곡을 통과하지 못하고 쓴잔을 마시며 후회 한들 소용이 없다. 그들에게 돌을 던진 사람들은 얼마나 깨끗하고 떳떳한 사람들일까.
 
  십자가는 회피 할 대상이 아니라 천국 문으로 들어갈 수 있는 높은 사다리인 것이다. 사다리를 한 층 한 층 성실하게 오르는 자 만이 행복의 열쇠를 획득할 수 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 고 한 영국의 종교시인 퀄스의 말을 다시 새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