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 <문학평론가>

 우연히 볼 일이 있어 충북선 열차를 타게 되었다. 얼마 전에도 일이 있어 충주와 제천엘 갔는데 직접 차를 운전하고 갔더니 피곤하기도 하고 바깥 경치를 제대로 음미할 수 없는 불편함이 있었다. 요즘 기차여행은 전에 비해 참 편리하다. 인터넷으로 표를 미리 끊고 시간에 맞춰 역으로 가면 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붐비지도 않고 검표원도 없어 전에 비해 번거로움이 덜하다. 게다가 제천은 지리적으로는 충북에 속해 있지만 거의 강원도에 가깝고 청주에 비해 풍광이 수려해 훨씬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곳이다.
 산들산들 봄바람이 불고 날씨가 더할 나위 없이 포근해 어디론가 마냥 떠나고 싶은 어느 날 기차에 오르니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한가로이 창가 쪽 자리에 앉고 보니 오랜만의 기차여행이란 생각이 새삼 들었다. 게다가 이 화사한 봄날 혼자만의 나들이라니 더욱 낭만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염없이 이어지는 창밖의 경치는 영락없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화사하게 핀 개나리는 산등성이를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고 산수유며 목련도 덩달아 피어나 이미 봄이 무르익어가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파릇파릇 펼쳐지는 보리밭 풍경이며 왕성한 생명력을 과시하는 싱싱한 흙빛은 만물이 소생하는 봄날임을 자랑하고 있었다. 드문드문 나타나는 가옥, 드넓은 들녘,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이 아기자기하게 어우러져 보는 이의 마음을 푸근하게 감싸주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고 서정적인 풍경이었다. 덜그럭 거리는 기차의 리듬과 창밖의 경치가 어우러지며 마치 유년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급속한 산업화로 많은 이들이 자동차를 이용하며 그동안 기차는 한물간 교통수단으로 취급받으며 소외된 감이 있다. 오랜만에 기차를 타고 보니 마치 질주하는 고속버스에서 내려 시골길을 걷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기차여행은 어쩐지 사람 냄새가 나고 푸근하며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제공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차분히 다독이며 여행의 참 멋을 느끼게 해 준다. 몇 개의 역을 지나며 창밖 경치에 취하다 보니 소란스런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이 들었다.
 몇 년 전 겨울, 캐나다 밴쿠버에서 기차를 타고 록키여행을 간적이 있다. 캐나다에서는 기차여행이 비행기를 이용하는 것보다 더 비싸기 때문에 기차를 타보지 못한 사람이 제법 많다. 특히 록키여행을 기차로 해 보았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한다. 이미 여러 차례 록키를 다녀온 터였지만 기차로는 가 본적이 없어 마음먹고 떠난 여행이었다. 크리스마스 무렵 저녁시간 밴쿠버에서 출발한 기차는 이튿날 점심이 넘어 록키 부근역에 도착했는데 밤새도록 이어지던 드라마틱한 풍경은 지금껏 잊을 수가 없다.
 록키가 험준한 산맥이고 보니 굽이굽이 이어지는 창밖 경치 또한 비경이었다. 가파른 단애, 거대한 교량 위를 지나가기도 하는데 하얀 눈빛에 반사되어 밤중임에도 온 세상이 환하게 드러났다. 교교한 달빛과 대자연의 수려한 풍광이 어우러져 마치 신화속의 풍경을 연상시켰다. 그때의 마주한 대자연의 장엄한 풍경과 밤이 주는 신묘한 기운, 기차여행이 주는  낭만이 어우러져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만드는 기회가 되었다. 아마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여행을 꼽으라면 그때 기차를 타고 떠난 록키여행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충북선이 보여주는 풍경은 록키의 장엄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아기자기한 한국의 소박한 풍경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부여한다. 쉽고 부담없이 낭만적인 시간을 누릴 수 있다. 제천에 당도해 역전 분식집에 들어가 칼국수를 시켜 먹었는데 시원한 멸치국물에 감자와 호박을 송송 썰어 넣어 그렇게 맛이 좋을 수가 없었다. 분식집 옆 찐빵 가게에서 파는, 황기를 속에 넣은 황기 찐빵이 유명하다기에 몇 봉지 사서 들고 나왔다. 유난히 찐빵을 좋아하는 나는 얼마 전에도 전국에서 제일 맛있다는 포항 구룡포 찐빵을 지인이 사다줘 먹은 적이 있다. 볼일을 마치고 제천 시내를 둘러보았는데 약초 간판이 붙은 집이 많이 눈에 띠었다. 가히 약초의 고향이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친정언니가 수십 년째 제천서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공기도 맑고 살기도 좋아 나 또한 이곳에서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따사로운 봄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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