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준 <청양군 목면 부면장>

낡은 것들에 정이 간다. 세월의 무게를 느낄 수 있어서다. 영화도 오래된 게 좋다. 새로 나온 영화를 보지 않으면 혹시라도 세상에 뒤떨어지는 듯 숨 가쁘게 사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쉘 위 댄스. 1996년에 일본의 수오 마사유키가 만든 걸 2004년 미국의 피터 첼섬이 리메이크 한 영화다. 괜찮은 작품들은 원작이 잊혀 질 무렵이면 리메이크 판이 나오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그 겨울, 바람이 분다’도 마찬가지였다. 2002년에 일본에서 만든 ‘사랑 따위는 필요없어. 여름’이라는 드라마를 10년 후에 다시 만든 거다. 아무튼, 일본의 국민배우 야쿠쇼 코지가 주연한 원작이 잊혀 질 무렵 미국의 간판스타 리처드 기어가 주연한 리메이크 판을 만났다. 오래된 영화다.

존 클라크(리처드기어)는 유언집행 전문변호사다. 사람들이 마지막 세상에 남긴 희망사항을 이루어 주느라 바쁘게 산다. 어느 생일날 아내가 그에게 파자마를 선물했다. 당신 선물을 고르는데 무척 힘들었다면서. 욕실에서 목 뒤에 붙은 파자마의 가격표를 떼어주면서 아내는 말한다. 생각해보니 당신이 원하는 게 없더라고요. 그가 아니라고 부정하자, 아내는 그럼 당신이 원하는 걸 말해보라 한다. 그는 대답한다. 딸 에반이 집에 돌아오고, 모두 모여서 식사하고, 또 당신이 만든 케이크를... 일상에서 누리는 소소한 행복들이 그가 살아가는 힘이다. 아내는 웃으며 또 묻는다. 그것 말고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것 하나만 말해 보세요. 그는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긴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뭘까. 사느라 바빠서 자기조차 잊고 살아가는 나이. 중년의 비애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퇴근길에 한 여자와 마주치게 된다. 미찌 댄스스쿨의 댄스교사 폴리나다. 철로 변 창문을 통해 밖을 바라보던 그녀와 차창에서 무료하게 밖을 바라보던 그의 눈길이 마주쳤다. 운명적인 만남이다. 이후 그는 퇴근길마다 차창 밖을 바라보며 그녀를 찾는다. 그녀로 인해 메마른 중년 클라크의 일상에 갑자기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가 삶에서 원하는 것을 찾은 건가. 몇 번 망설임 끝에 그는 그녀의 댄스스쿨을 찾아간다. 구실을 댄스 교습이지만 속셈은 물론 폴리나다. 댄스교습시간 내내 그는 폴리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귀가 길에 그는 폴리나에게 저녁이나 함께 하자며 접근을 하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한다. 내가 목적이라면 춤 같은 거 그만 두라고. 무안해진 그는 집으로 돌아가면서 춤을 그만둘 것을 고민한다.

고민 끝에 결국 그는 다시 댄스스쿨을 향한다. 춤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녀의 모습에 홀려 들어왔지만 그는 이미 춤을 그만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의 일탈이 그녀에게서 춤이라는 다른 대상으로 방향을 바꾼 것이다.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는 건 불확실성의 위험을 동반하는 일이다. 위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일탈의 유혹을 외면하지 못한다. 일상을 버티는 에너지를 일탈에서 얻기 때문이다. 그날 그녀의 매몰찬 거절이 없었다면 그는 춤과 인연이 없는 다른 삶을 살아 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춤이라는 대상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즐거움을 얻었다. 그에게 춤은 이미 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 돼 버렸다.

어느 날 저녁 그는 폴리나에게 고백한다. 처음 이곳에 온 것은 당신 때문이었노라고. 그녀도 물론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춤에 대한 그의 열정도 충분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날 밤 그들은 아무도 없는 댄스 교실에서 함께 춤을 춘다. 불도 켜지 않은 채. 어둠속에서 그들의 춤은 댄스라는 형식을 빈 깊은 교감이었다. 플로어를 누비는 스탭은 격렬했고 상대방의 움직임을 통해 주고 받는 몸의 언어는 뜨거웠다. 어느 러브신보다도 농밀한 관계의 은유였다. 그들은 춤을 통해서 하나가 된다.

쉘 위 댄스는 중년의 일탈을 통해 삶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는 영화다. 주인공 클라크의 경우처럼 중년들의 삶은 무미건조하다. 아이들은 이미 다 자라버렸고 아내의 다정함도 예전같지 않다. 집도 직장도 이방인처럼 겉도는 중년. 그래서 중년들은 무기력한 삶에서 일탈을 꿈꾸는 것일 게다. 중년의 일탈은 살아 있는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열망의 증거다. 아무도 관심없는 자기 삶을 스스로 안간힘을 쓰며 재정비하는 셀프 리모델링 과정이다. 그렇게 일탈은 삶의 동력이 된다. 영화는 클라크의 선택을 통해 당신에게 묻는다. 생일날 선물상자 안에 담긴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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