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희 <침례신학대학 교수>

봄꽃, 하롱대는 봄꽃천지다. 꽃송이들은 어찌도 느꺼운 목숨인지 세상을 밝히고, 마음을 채운다. 꽃이 피다니, 나뭇가지마다 꽃들이 생겨나 하늘거리다니. 신기하고 기특하다. 어느 한날 갑자기 우르르 기쁨처럼 피어난 꽃들을 매달고 가지들도 흔연할까.
 꽃을 보다가 아직은 가시지 않은 추위를 잊은 덕에 꽃같은 감기를 몸에 달고 지내기도 하는지. 밖은 꽃, 안은 감기라니, 이런 균형도 있기는 한지.
 꽃을 기다리며 화원을 유심히 들여다 보기도, 화분에 핀 꽃들을 보면서 창 밖의 나뭇가지들을 무수히 축수하기도 했는지. 마치 꽃이 피어나면 남루한 일상에 화들짝 놀라운 기쁨이라도 생겨날 것처럼 가지마다 기대를 걸어놓기라도 했는지.
  꽃을 보는 일로 먼 데까지 훨훨 나다닐 일인지. 기쁨 나누듯 몰려다니며 길 위서 수런대 볼 일인지. 날이 미처 풀어지지 않아 옷깃을 여미더라도 산과 길과 꽃과 봄의 술렁임에 잠겨 흥청대 볼 일인지. 많은 인파에 달리는 시간보다 멈추는 시간이 긴 길을 자동차로 지날 때는 길 가 봄꽃으로 눈 씻고 마음에 봄빛을 줄창 담을 일인지. 바쁜 일도 없이 꽃나무 밑을 쑤왈거리며 오갈 일인지. 놀라운 아름다움, 꽃을 보자는 일로.
 젊은 어느 때 꽃보다 우람한 나무가 좋기도 했던지. 단순한 명료함이 급했던 시대 아니 시기였을 그 때. 꽃을 나무와 견주면서 푸르고 곧게 자란 나무들을 자주 마음에 두었을지. 나무 좋아한다고 꽃이 안좋을 아무 연관 없이도 그 일은 제법 오래 그랬던지. 그런 단순비교들이 내 사고의 많은 부분에 여즉도 있으리라. 이런저런 영역구분과 분류에 몰두하는 사고의 빈약함을 선명함으로 이해하기로 하면서 그렇게. 단순한 명료함이 어느 한 때는 그렇게 좋았을지. 군더더기 없는 간결과 속되지 않은 고결한 것들, 좋아하면 내 것이 될 것도 같던 선망의 시기에. 어째서 함께 좋아하면 안되었던가. 꽃은 섬세해 아름답고, 나무는 나무라 좋은 그 아름다움에 어쩌자고 친소를 들이대 구별하려 들었을까. 이런 영세한 사유의 유택이라니.
 언제쯤이면 개별적인 것들의 아름다움을 유장한 흐름에 놓고 제대로 보아낼거나. 어느 하나가 아니고, 다른 하나들을 보는 그 일. 나무도 풀도 꽃도 사람도 다 제 나름 이유가 있다는 그런 것들, 그걸 구체적인 목숨으로 이해하는 그런. 단순한 아름다움도 있지만, 절실한 아름다움도 있다는 그런.
 피는 절실함도, 자랑스러운 화창함도, 지는 슬픔도 목숨에는 모두 있다는 것, 그래서 어느 순간이고, 목숨 가진 것치고 절실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는 것을 서서히 더 깊이 알아는 가는 중인지. 사십이 내 인생에는 오지 않을 줄 알았다는, 굵고 짧게 찬란히 살고 싶었다는 , 간명하게 살고 싶었다는 그런 이야기들은 미숙함의 드러냄 일지 모른다. 목숨의 의미는 살아내는 데 있지 화려함에 있지 않을 것이기 때문. 목숨의 의미는 그런 것일 터이니.
 교정에는 세상에서 가장 먼저 봄꽃이 핀다. 아직 다른 나무들이 침잠할 때 도서관과 강의동 사이에 목련은 망울을 부풀리기 시작한다. 내 사는 우물같은 세계에 봄꽃은 그 나무에 가정 먼저 온다. 하여, 내가 아는 세상의 봄은 도서관과 강의동 사이 그 나무로 가장 먼저 현현하고 거기서부터 한 해의 봄꽃은 시작되는 것이다. 흐리고 맑은 날이 오고가는 어느 사이, 꿈결처럼 꽃은 피어나 더워오는 하늘 아래 찬연히 빛나고 있을 때, 그 나무 아래 서성이고 웃고 눈부셔하면서  뒤이어 필 꽃에 대한 기대까지 벋어가는 건 나의 일이리. 세상이 휘황한 철, 등불 같은 꽃나무 아래 서서 엄청난 선물더미 아래 있듯 황홀해 하며 지루한 한 철을 또 넘을 그 일. 지금 지구 어느 쪽은 두렵고 흉악한 지진과 테러로 고통을 겪는 중이고, 우리도 전쟁 협박을 받고 있기도 하다. 나중에야 삼수갑산을 갈망정 지금은 꽃의 철이니 잠시 그에 집중하기로 한다. 삶의 한 고개를 꽃과 함께 넘자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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