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박용만과 함께 독립운동계의 ‘3으로 평가되는 독립운동가 정순만(鄭淳萬·1873~1911)의 생애와 활동에 관한 연구논문과 자료가 최초로 집대성 된 독립운동계의 ‘3정순만을 박걸순 충북대 사학과 교수가 출간했다.
정순만은 청원군 옥산면 덕촌리 하동정씨 집성촌에서 출생하여 독립협회, 상동청년회 등에서 간부를 역임하며 한말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고, 1906년 이상설·이동녕 등 동지들과 망명하여 북간도와 연해주지역의 민족운동을 주도한 인물이다.
정순만은 간재 전우의 문인으로서, 전기의병 참여를 시작으로 민족운동에 나섰으나, 곧 개화 계몽으로 전환해 독립협회에 참여했다. 특히 상동청년회의 서기로서 이승만·박용만·김구·이준·이동녕·최재학 등 동지들과 함께 멕시코 이민 참상 규탄·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투쟁·을사오조약 반대 상소투쟁·을사오적 암살 기도 등 민족운동을 주도한 인물로 알려졌다.
일제의 탄압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의 민족운동이 불가능하자, 그는 1906년 봄 이상설·이동휘 등 동지들과 함께 망명길에 나서 북간도 용정에 터를 잡았다. 여기에서 그는 이상설 등과 북간도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설하고 동포 자제들의 교육활동에 온 힘을 쏟았다.
19074, 헤이그 특사 파견 소식을 들은 그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블라디보스토크로 달려갔다. 특사 사절단의 정사인 진천 출신 이상설은 선생과 국내에서부터 호형호제하면서 망명의 길을 같이 나선 동지요, 부사로 선임된 이준 또한 상동청년회에서 함께 활동하다가 투옥된 동지이기도 했다. 헤이그 특사에서의 선생의 공로는 특기돼야 할 것이다.
그 후 선생은 일제의 탄압으로 연변에서의 활동을 마감하고 연해주로 옮겨 해조신문대동공보의 기자 겸 주필로서 한인의 계몽을 위해 크게 활약했다.
특히 1909년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의거 때에는 계획 단계부터 참여하여 일제로부터 배후 인물로 지목 당했는데, 거사 후에는 안중근의 구명을 위해 모금에 나서는 등 적극 노력했다. 일제의 비밀문서에 의하면 그는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이범윤·이갑·최봉준과 함께 유력한 파()의 수장(首長)으로서, ‘정순만파를 이루고 있다고 파악할 정도로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그러나, 1910, 그가 오발 사고로 블라디보스토크 민회장 양성춘을 쏴 죽이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그는 그 대가로 1년여의 옥고를 치르고 나와 민족운동의 재기를 도모하다 양성춘의 형과 미망인에게 처참한 복수를 당하여 파란만장한 일생을 마감하고 이역만리에서 고혼이 되고 말았다.
정순만은 독립운동 당시부터 이승만·박용만과 독립운동계의 ‘3으로 불렸고, 본인도 그렇게 자부했다. 그는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중요한 순간에 중요한 위치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현재 정순만은 그들에 비하면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인물에 불과하다. 학계에서의 연구 편중 현상은 물론이거니와, 지역민조차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38세의 나이에 요절한 그는 사진 한장조차 남기지 않았다.
독립운동 당시부터 지역 파쟁의 희생이 되어 정당한 역사적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극적인 삶과 격정적 성정도 평가의 장애 요인이 됐으며, 그의 외아들이 어린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는 바람에 사실상 후사가 단절되는 등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만이 민족운동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신문이나 일제의 비밀문서 등에는 그에 관한 자료가 산발적으로 확인된다. 그간 정순만에 대한 연구를 진행해 온 박 교수가 6년여의 국내외 지역 자료수집과 분석 끝에 사진편·논문편·자료편의 3부로 구성해 발행했다. 특히 이 자료집을 통해 최초로 공개되는 일제 비밀문서 등 희귀자료가 적지 않다.
어려운 한문과 일본어로 된 원전 자료는 번역본을 첨부해 열람에 편의를 제공하였다. 선생의 아들 정양필씨와 며느리 이화숙씨도 미주지역 독립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독립운동가로 포상됐는데, 그들에 관한 자료의 일부도 첨부했다.
경인문화사, 675, 5만원.
<김재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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