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극동대학교 언론홍보학과 교수)

“나는 결혼을 했고 행복하다. 이젠 그분의 이름을 연관 검색어에서 없애 줬으면 좋겠다. 그분도 편하게 지낼 수 있게….”

  얼마 전 케이블TV에 출연한 한 방송인의 말이다. 다른 사람과 결혼한 지금도 인터넷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할 때마다 오래 전 헤어진 옛 애인의 이름이 연관 검색어로 뜬단다. 유명 연예인들만이 아니다. 보통 사람들도 온라인에 무심코 올렸던 사진이나 글이 자신도 모르게 떠다니는가 하면 남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온갖 개인사가 그대로 노출돼 낭패를 보곤 한다.
  인터넷에 한 번 올라간 정보는 여간해서는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언제 올렸는지 기억나지도 않는 자기 정보의 자잘한 단편들이 구천을 배회하는 영혼마냥 사이버 공간을 떠다니고 있다. 아무리 오래된 내용이라도 누구든 검색만 하면 손쉽게 관련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일단 노출된 정보는 ‘유통기한’도 ‘유효기간’도 없다. 잊을 만하면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들이 또 다시 떠오르질 않나 심지어 일부 네티즌들의 악의적인 ‘신상털기’의 사냥감이 되기도 한다.
  크건 작건 이런 일을 한 번이라도 당해본 사람이라면 최근 회자되고 있는 ‘잊혀질 권리’가 절실할 것이다. 잊혀질 권리란 ‘자신과 관련된 정보 가운데 알려지기 원치 않는 내용에 대해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정보의 생산은 쉬운 반면 삭제와 파기가 용이하지 않은 인터넷 환경에서 그 필요성이 부각되고 있는 새로운 권리 개념이다.
  이러한 권리를 법적으로 행사할 수 있게 하자는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작년 1월 인터넷에서 정보 주체의 권리를 강화하기 위해 잊혀질 권리를 명문화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정보보호법 개정안을 확정했다. 이 개정안은 개인과 법인을 포함한 유럽연합의 전 회원국에서 법적 구속력을 갖는 최고 수준의 규범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인터넷에 글을 올린 사용자가 서비스 제공자에게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삭제를 요청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저작권법 및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지난 2월 국회에 상정되었다. 같은 달 27일 한국인터넷자율정책기구는 연예인이나 일반인의 경우 당사자가 요청할 경우 인터넷 포털의 연관 검색어를 삭제해주기로 결정했다.
  그만큼 인터넷 정보의 바다의 오염이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잊혀질 권리를 법적으로 보장한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될 것인가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도 많다. 표현의 자유를 중시하는 미국에서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문제라는 인식 하에 잊혀질 권리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지만 입법화에는 아직 유보적인 분위기다. 국내에서도 법제화는 다소 성급한 시도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인터넷은 누구나 자유롭게 정보를 생산하고 유통시킬 수 있다는 정신에 기반하여 형성된 새로운 세상이다. 인터넷에 축적된 수많은 정보는 이제 일종의 역사기록으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누구든 이 방대한 기록의 더미에서 관심 있고 필요한 정보를 찾아볼 권리가 있다. 그런데 당사자가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기 정보를 삭제할 권리를 인정한다면 인터넷의 존립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도 있다.
  자신에게 좋은 내용이건 나쁜 내용이건 기록은 보존되어야 한다. 물론 잘못된 정보나 부정확한 기록은 바로잡아야 한다. 이는 현행 법제에서도 가능하다. 특정인에 대한 신상털기나 악의적인 정보의 유포는 잊혀질 권리의 법제화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개인의 잊혀질 권리만큼 국민들의 알권리와 정보의 자유로운 유통도 중요한 가치이다. 빈대 몇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태울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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