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준(청양군 목면 부면장)

칠갑산에 봄이 왔다. 침엽수만 보이던 겨울 산에 하나 둘 벚꽃이 터지고 여기저기 활엽수들이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다. 온 산의 나무들이 겨우내 참았던 신록 아우성을 한꺼번에 터트리는 봄이다. 칠갑산의 봄은 나무들의 축제다. 지난겨울을 장하게 이겨낸 것들의 생명잔치다. 그들의 신록 축제로 내 출근길 30분이 요즘 더 없이 즐거워졌다.

축제는 주정 삼거리부터 시작된다. 커튼처럼 접힌 능선위에 봄빛이 선연하게 올라온다. 이 능선들이 모이고 쉼 없이 이어져 칠갑산의 봄을 이룰 것이다. 오르막을 지나면 칠갑호가 반긴다. 봄 산을 담은 물빛은 순하디 순하고 물속에 비친 칠갑산의 반영은 흐리게 흔들리고 있다. 호수도 봄에 취한게다. 저수지가 끝날 무렵 벚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역광으로 고운 자태가 빛난다. 꽃다운 한 철을 보낸 벚나무가 이제는 신록을 자랑하고 있다. 온 몸으로 찬란한 봄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봄은 눈부신 빛의 잔치다. 꽃이 진 나무조차 아름다운.
   
출근길이 동쪽방향이라서 아침 풍경은 늘 역광이다. 역광은 피사체를 돋보이게 하여 드라마틱한 사진을 만든다. 며칠을 벼르다가 결국 카메라를 들이댔다. 뷰 파인더 안에 잡힌 벚나무가 그냥 평범하다. 마음속에 그려진 이미지가 아니다. 방금 전 봤던 찬란한 빛 단장 같은 건 사라지고 없다. 욕심이 과했던 것일까. 봄 풍경은 도저히 카메라로 잡을 수 없는 대상이다. 나무에 내려앉은 봄 햇살을 어떻게 서툰 솜씨로 잡을 수 있겠나. 잡으려 하면 사라지는 신기루같은 거다. 그래서 아름다운 것들은 가슴 속에 만 담아둬야 하나보다. 좋은 사람 가슴에 담듯. 

오른쪽으로 조금 꺾으면 해장국집이 보인다. 해장국집 앞은 연록, 초록 진록으로 수놓은 열두폭 병풍이 늘어서 있다. 조물주가 봄에 모을 수 있는 녹색이란 녹색은 모두 모아 놓은 곳. 봄 산을 수놓은 신록의 색상환은 자연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색의 향연이다. 봄에 돋는 상수리나무의 오묘한 색감보라. 신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솜씨다.

산이 아름답다 하면 사람들은 대개 가을 산을 떠올린다. 그러나 봄의 신록도 가을 단풍에 지지 않는다. 봄 산은 가을 산과 다른 맛이 있다. 가을의 칠갑산이 유화라면 봄 칠갑산은 수채화다. 양쪽 겨드랑이에 봄이 그려놓은 수채화를 거느리고 느릿느릿 나가다 보면 멀리 보이는 큰 나무의 초록 잔치가 장관이다. 대치리의 느티나무다. 느티나무에도 봄이 뭉텅 내려앉았다. 육백년이 넘는 세월동안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의 봄맞이가 장하다. 느티나무 너머로 보이는 대치리 마을 풍경도 봄기운을 받아 순해졌다. 풍경 속에 들어가면 사람도 순해 질 것 같다
 
대치터널을 지나면 일순 풍경이 달라진다. 분홍빛 복숭아 밭과 어우러진 연초록 봄 산은 무릉도원이 따로 없다. 냉천골 개울에 흐르는 복숭아 꽃잎을 따라 올라가면 금방 전설속의 무릉도원이 나올 것 같다. 무릉도원을 지나면 오른편에 천장호가 나타난다. 몇 년 사이 등산객들이 넘쳐나는 명소가 된 출렁다리도 보인다. 출렁다리로 오르는 등산로는 지금 쯤 연분홍 산철쭉이 한창일 게다. 초록 능선위의 화사한 연분홍 꽃무더기들은 등산객 혼을 빼놓기에 충분하다. 봄 한철 조물주가 칠갑산에 내린 귀한 선물이다. 천장호를 지나면 축제는 잠시 숨을 고른다. 

산길 곳곳이 도로를 바로잡는 공사로 반듯해 지고 있다. 봄 산을 느릿느릿 구경하다 보면 옛날 구불 길이 아쉬워진다. 편리한 직선에 지친 시대다. 불현듯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 다녔던 곡선의 여유가 그리워지는 것이다. 자동차로 30분 거리. 목면은 관내에서는 비교적 먼 출근길이다. 좀 멀다 해도 도시의 짜증나는 출근길에 비 할 바 아니다. 30분 봄 산의 축제를 생각하면 오히려 눈이 호사하는 각별한 시간이다.

좀 더 천천히 봄 산을 즐기려면 느린 자전거가 제격이다. 언젠가 시험삼아 자전거를 타고 사무실까지 간 적이 있다. 한 시간 반이나 걸렸다. 자전거 출근길로는 좀 먼 거리긴 하나 아주 불가능한 건 아니다. 마음먹기가 어렵다. 짧은 봄이 다 가기 전 실행할 즐거운 미션으로 남긴다.

이 땅의 봄은 짧다. 그래서 봄 산은 변화무쌍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르다. 그리하여 신록 잔치는 보름이면 동이 난다. 새순이 솟고 보름이면 진초록이 온 산을 점령하는 것이다. 화선지에 담묵 스미듯 삽시간에 여름이 번진다. 그렇게 봄날이 가고 칠갑산의 여름이 시작된다. 봄 산의 아름다움은 길지 않다. 절정은 늘 짧은 법이다.

짧은 봄을 아쉬워만 할 것인가. 하루하루 소중하게 누리고 살아야 한다. 잡을 수 없는 봄날을 즐기는 지혜이고 지금 여기를 늘 봄날처럼 누리는 비결이다. 덧없이 봄날이 가듯 당신 삶도 일장춘몽이다. 하루하루를 마음껏 즐기며 사시라. 누려야 비로소 당신 삶이다. 봄날은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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