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본사 상임이사)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다(안도현의 시 ‘무식한 놈’)
내가 그렇다. 무식하기 짝이 없다. 쑥부쟁이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절초 모양이 어떤지 모르고 평생을 살아왔다. 그래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불편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근래 들어 이런 것들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이른 봄 아파트 담장 밑에서 조그만 풀싹들이 올라오더니 햇살이 따뜻해지자 좁쌀만한 꽃들을 피우기 시작했다. 가까이 앉아서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것이 꽃인지 티끌인지 구분할 수도 없는 작은 꽃이었다. 그런데 문득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저 풀은 무엇일까? 저 꽃도 이름이 있을까?
그렇게 해서 이른 봄부터 생태탐사를 따라다니기 시작했다. 시간이 나는 주말이면 우암산, 것대산, 선도산, 내암리 등 도시 주변의 산들을 찾아, 하루하루 달라지는 숲의 모습을 관찰했다. 그동안 그렇게 산을 다녔어도 심장이 좋아져라 폐활량이 늘어나라 다리야 튼튼해져라 하면서 내 몸의 건강만 생각하고 다녔지, 발걸음을 멈추고 나무를 보고, 돋보기로 꽃을 들여다보고, 냄새를 맡으며 다닌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동안 무심코 스쳐 지났던 모든 곳에서 나무들이 자라고 있었고, 풀들이 꽃을 피우고 있었으며, 제 씨앗을 만들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생명들이 있었다.
그들과 새로운 만남을 가지며 행복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선도산 정상에 올라 투명한 산자고꽃을 보고, 노란 개복수초꽃과 눈맞춤을 하고, 낙엽속에 숨어있는 족두리풀의 음전한 꽃을 찾아내고, 새끼손톱보다도 더 작은 보랏빛 구슬봉이꽃을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보물을 찾은 듯, 그리운 옛친구를 만난 듯 가슴이 벅차고 뿌듯했다.
모든 식물들이 꽃을 피운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다. 개암나무의 빨간 암꽃이 얼마나 앙징맞고 고혹적인지, 으름나무의 연보랏빛 암꽃과 올망졸망한 수꽃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지, 하얗던 인동꽃이 수분을 맺고 나면 벌을 위한 배려로 노랗게 변하고, 돌단풍도 수분 후 꽃술색깔이 변하는 등 자연의 현상 또한 놀랍고 신기했다.
무엇보다 다행인 것은 길가나 아파트 담장가에 지천한, 그동안 이름도 모르고 지나쳤던 작은 풀들의 이름과 풀꽃의 생김새를 확실히 구별할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이다.
요즘 우리 아파트에서 눈을 맞춘 꽃들만 해도 그 이름을 대려면 손가락이 모자란다.
꽃마리, 양지꽃, 민들레, 제비꽃, 흰제비꽃, 닭의장풀, 씀바귀, 냉이, 꽃다지, 큰개불알꽃, 주름잎, 선개불알꽃, 괭이밥, 붉은괭이밥, 개미자리, 별꽃, 지칭개, 벼룩나물, 벼룩이나물, 나도점나물, 조개나물, 광대나물, 개망초, 질경이, 바랭이, 갈퀴덩굴, 환삼덩굴, 살갈퀴, 쇠뜨기, 애기똥풀, 쑥, 뽀리뱅이, 소리쟁이, 며느리배꼽, 명아주....
그 뿐인가. 나무도 만만찮다.
수수꽃다리(라일락), 백목련, 개나리, 연산홍, 주목, 산수유, 쥐똥나무, 사철나무, 측백나무, 잣나무, 모감주나무, 튤립나무, 회나무, 느티나무, 단풍나무.... 아, 이 많은 것들을 모르고 지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요즘 아파트를 나서려면 먼저 이들 풀꽃이 눈에 들어오고, 그러면 잠깐 발을 멈추고 눈인사를 한다. 이제 저들이 씨앗을 맺고 나면 또다른 풀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겠지.
5월은 생태탐사를 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모든 나무들이 제각기 다른 모양의 잎새들을 틔우고 봄꽃들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며 숲의 속살을 채우기 때문이다.
삶이 팍팍해지면서 숲은 최고의 힐링 장소로 각광을 받고 있다. 산소와 음이온과 피톤치드와 몸에 좋다는 것들을 선사하는 숲. 그 숲과 가까워지려면 먼저 풀과 나무와 가까워질 일이다. 그리고 5월이 가기 전에 숲과 들을 찾아 이들이 선사하는 호사를 누려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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