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애(충북대교수)


  신록의 푸름이 나날이 달라지고 있다. 녹색이라 부르는 한 가지 빛깔만 해도 어쩜 그렇게 다양한지, 나무마다 잎의 색이 드러내는 정취가 각양각색이다. 잎사귀에 얹혀있는 소담한 꽃송이들로 활처럼 휘어진 가지들이 힘겨워도 보인다. 바람에 날리는 그윽하고 향긋한 냄새를 따라 눈을 돌려보니 어느새 아카시아가 흰 꽃송이를 주렁주렁 매달고 있다. 5월은 계절의 여왕답게 생동감 넘치는 산수화를 선물하고 있다.
   5월 5일 어린이날을 잊고 지난지도 오래되었다. 아이들 선물 살 고민과 집을 떠나 어디론가 나들이를 가야 할 부담도 없어졌다. 금년처럼 공휴일이 일요일과 겹쳐도 그리 억울하고 아쉽게 생각하지 않는다. 평소 주말처럼 느긋한 마음으로 커피 한 잔 들고 창밖을 보니 장난감을 손에 든 아이와 부모들의 정겨운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 전 어린이날 경기도의 한 놀이공원에 갔다가 밀려든 사람들로 인해 공원입구도 들어가지 못하고 정체된 차량 행렬에서 고생만 했던 생각이 난다. 차멀미를 하는 아이는 머리가 아프다고 보채고, 놀이기구 탈 마음에 들떠 있던 아이는 기다림에 지쳐 짜증을 내다 잠이 들어버렸다. 가다 섰다를 반복하는 지루함이 계속되다 갑작스러운 급정거에 놀라 살펴보니 우리가 탄 차 앞바퀴 부근에 어린아이의 꽃신이 나동그라졌다. 반대 편 차선을 운행하던 차에서 동생의 생리현상을 처리하느라 내린 엄마를 찾아 나선 꼬마가 앞으로 튀어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다. 주행속도가 빠르지 않아 신발이 벗겨지고 발등이 긁히는 가벼운 상처에 그쳐 천만 다행이었다. 병원 진료 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친 아이의 부모에게 사과를 했더니 젊은 부부는 오히려 자기 아이의 부주의로 즐거워야 할 여행을 망친 것에 미안하다며 치료비도 받지 않으려 했다. 그날 이후 우리 가족은 원거리 명소 대신 가까운 소풍지에서 어린이날을 보냈고, 자동차 사고는 어떤 경우라도 상대를 먼저 배려하는 여유를 갖기로 했다. 
  어버이날 무렵, 선물로 들어온 식품이 너무 많으니 가져가라는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혼자 드시기에는 정말 많은 양이었다. 제주 특산품이 고루 든 상자 속에는 올 해 당번을 맡은 동생 친구의 90대 노모를 모시며 사는 애틋한 효심을 담은 글도 함께 들어있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기생 몇 명이 어버이날 해마다 부모님 댁에 선물하는 행사를 수년전부터 해오고 있다고 한다. 순번을 정해 선물을 장만하고 편지를 써서 보낸다고 한다. 하늘나라로 먼저 간 친구를 대리해 잠시나마 자식의 숨결을 느끼시게 아들 노릇을 해드린다고 한다. 해마다 지역의 특산물을 맛볼 수 있는 새로운 즐거움과 여러 명의 자식 또래들로부터 감사 편지를 받는 색다른 기쁨을 누리게 해드리는 좋은 아이디어를 배웠다.
  스승의 날을 즈음하여 모교 총 동문회에 참석하였다. 시간을 내기 어려운 상황이어서 망설이다가 40여 년 전 은사님을 뵙는다는 설렘으로 잠시 틈을 내기로 했다. 담임선생님이 아니었음에도 우리의 재학시절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계신 것에 놀랐고, 바쁘다는 핑계로 감사 인사 한번 드리지 못한 것이 더욱 송구했다. 한 제자로부터 30여 년간 해마다 감사카드를 받아온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 제자의 성의가 더욱 고맙게 느껴졌다. 꿈 많던 소녀시절  인생의 중요한 방향키가 되어주셨던 1학년 때 담임선생님께서 병환으로 참석하지 못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의 도리를 하지 못함에 대한 용서와 빠른 쾌유를 마음속으로 빌었다. 
  5월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남편과 아내,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의미에서 정한 기념일이라고 한다. 어린이날 소원은 ‘엄마 아빠와 함께 사는 것’이라는 아이들의 대답이 코끝을 찡하게 만든다. 부부가 평화로운 가정을 만들어 간다면 부부 자신은 물론 그 가정의 자녀와  부부의 부모 행복도 보장된다. 평범하고 쉬운 행복의 지름길을 가까이 두고 우리는 어려운 길로 멀리 돌아가면서 어떤 때는 너무 멀리 가버려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 신혼 초 사랑했던 감정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도록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만큼 상대를 배려하는 연습을 많이 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 주시고 헌신적으로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하고, 사회적 역할에 충실할 수 있게 가르치며 이끌어 주신 스승님께 감사하고, 일생의 반 이상을 함께 하며 살아온 반려를 더 사랑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있는 자식이 있음에 감사하는 5월을 보내며 그동안 못다 한 사랑과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