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본사 상임이사)

중3짜리 조카가 시름에 잠겼다. 시험 성적 때문이다.
평소 착하고, 속 깊고, 맵시 있고, 글도 제법 잘 쓰며....5년 동안이나 성당에서 복사 봉사를 하는 등 나무랄 것 예쁜 소녀인데 이 세상 모든 고민을 끌어안은 사람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다. 손끝에 달고 살던 스마트폰은 엄마에게 빼앗기고, 스스로 공부해보겠다던 결심도 약해져 종합학원에 등록하겠단다.
조카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친구들과 잘 어울려 왕따같은 문제를 모르고 지내 참 다행이다, 다행이다 싶었는데 시험성적이 그 아이 가슴을 저리 깊게 멍들게 한 것이다.
충북이 청소년 자살 1위라는 통계가 마음에 걸려 조카를 위로할 겸 상담을 해보았다. 아이는 시험을 잘 봐야 한다는 생각을 강박관념처럼 갖고 있었다. 그래서 시험지를 받으면 가슴이 뛰고 문제를 풀다가 막히면 다음문제로 넘어가지 못한다고 했다. 시험을 잘 치르지 못한 것은 심리적인 데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내친 김에 아이의 시험문제지를 들여다 봤다. 그러다가 화가 나기 시작했다. 과거의 문제들과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보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교육이 주입식 교육이다, 사지선다형 문제로 사고력을 기르지 못한다 등 비판들이 있었고, 그래서 전인교육 열린교육이 시도되고, 토론과 논술이 도입됐으며, 국어도 읽기 듣기 쓰기 말하기로 나눠지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렇게 교육과정이 변천돼 왔어도 시험지는 여전히 사지(오지)선다형으로, 특히 한국사의 경우는 이해보다 암기를 해야 고를 수 있는 문제들이 대부분이었다.
과거나 이제나 학생들에게 역사과목이 외면받는 이유는 ‘역사는 어렵다’는 이유 때문이다. 나의 학창시절을 떠올려 봐도 역사공부가 당시의 사회 현상이나 개념의 이해보다는 무슨 사건이 몇 년에 일어났고, 당시의 제도와 기구의 이름은 무엇인지 외워야만 해서 싫었었는데, 지금의 아이들도 여전히 그렇게 해야 시험문제를 풀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얼마 전 모방송사 프로그램을 보고 황당했던 일이 있었다. 진행자가 청소년들에게 야스쿠니신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더니 한 학생이 가수 싸이의 노래가 생각났던지 “아, 젠틀맨 말인가요?”라고 답변을 한 것이다. 이들은 안중근, 위안부, 서대문형무소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다. 청소년들의 역사이해에 대한 현주소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그러나 이 아이들만 나무랄 수 있겠는가. 교과서가 좀더 쉽고 재미있다면, 시험문제가 가치관이나 역사적 사건에 대한 판단이나 이해를 돕는 문제였다면, 한국사 공부가 이렇게 외면받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단 한국사만이 아니다. 학습평가 변별력을 위해 학생들의 시험문제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 문제를 비틀어 내고, 함정을 만들고, 난이도를 높이기 위해 교과서 밖에서까지 문제를 가져온다. 특히 대입 수능시험이 서열을 정하는 시험이 되면서 고교시절 학습은 파행이 된지 오래다. 선행학습이라는 이상한 학습형태가 나타나 1학년때 2학년 전과정을 마치고, 2학년땐 3학년 과정을 마치는 등, 학교수업은 뒷전이 되고 학원과 과외가 정규수업처럼 돼버혔다. 이런 상황에서 조카아이가 시험강박증을 갖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문제들로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4월23일 열린 첫 국무회의에서 ‘교과서를 충실히 만들어 참고서를 볼 필요 없도록 하고, 모든 시험이 교과서 안에서 출제돼야 한다’고 밝혔다.  또 선행학습 부분에 대해서도 ‘(시험에) 내지 않겠다고 하면 실제로 나오지 않아야 한다’며 ‘교과서내 출제 원칙이 지켜지기 위해서는 교과서를 친절한 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대선 당시 사교육비 경감 대책으로 ‘모든 시험에서 교과서 중심으로 출제해 학교 공부만으로 대학 진학이 가능한 체계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었다.
교육부는 이런 내용을 담은 입시제도 개선안을 8월경 발표할 예정이라니 ‘교과서 내 출제 원칙’이 대학 입시는 물론 초중고교의 시험에도 적용돼 교육 체계 전반에 변화가 있기를 기대해 본다.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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