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수길(논설위원, 소설가)

 ‘힘을 갖지 못한 정의(正義)는 무효이며, 정의가 없는 힘은 포학(暴虐)이다. 우리는 정당한 것을 강하게 만들 수가 없어서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물리학자요 철학자인 파스칼(1623~1662)의 말이다. 정의(正義)에 대한 정의(定義)와 함께 이를 옳게 수용하지 못하고 강자에 편승, 굴복하는 인간의 보편적 속성을 질타한 것이 아닌가 싶다.
 79년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의 수사책임자였던 보안사령관 전두환 소장이, 상관인 정승화 참모총장을 공범자로 지목, 연행하는 과정에서 군부대간 충돌이 발생했다. 소위 12,12 사태, 전두환 소장이 주도한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특전사령관 정병주 소장은, 이 쿠데타를 저지하려다 부하의 총격으로 부상, 좌절되고, 쿠데타에 성공한 전두환 소장은 옛 상관이었던 정 소장을 강제로 예편 시켰다. 상관들의 명령을 거역, 외부의 적과 싸워야 할 군대를 동원, 하극상으로 권력을 장악한 사람은 승자가 되고, 부당한 쿠데타를 저지, 올바른 군인의 길을 가고자했던 사람은 패자가 되었다.
 ‘하나회’를 중심으로 뭉친 전두환 소장의 ‘힘’이 쿠데타를 성공시키긴 했으나, 그 힘에 과연 정의가 있었는가를 짚어보는 건 새삼스런 일이다. 다만, 정의를 지키려 했으나 힘이 없어 패자가 된 정 소장의 처지, 10여 년간 숱한 압력과 고통을 견디다 못해 자살(?)을 택한 그의 말로가 안타깝고, ‘정당한 것을 강하게 만들지 못하고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인 국민들의 나약했던 과거가 부끄러울 뿐이다. 
 쿠데타성공 후, 군복을 벗은 전두환은 ‘체육관선거’라는 비정상적인 민심의 동의(?)를 업고 권력의 정상에 올랐다. 그리고 그 권력의 유지를 위해, 용기 있게 저항하는 수많은 국민이 피를 흘리게 했다. 기업으로부터 뇌물을 받아 측근들에게 통 큰 선심도 쓰고 사금고에 떼돈을 쌓아 두었다. 권력의 정상에서, 그 단맛과 축재의 호사를 누리며 선심 혜택을 받은 측근들의 충성과 존경도 받았지만, 기사회생하던 민주주의는 한참 후퇴됐다.
 권좌에서 물러난 그는, 법의 심판(내란죄, 반란죄, 뇌물죄, 추징금 2205억 원)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사면으로 옥살이를 면하고, 백담사 유배 길에 들었었다. 하지만 추징금까지 면제 된 것은 아니었다. ‘전 재산이 29만 원 뿐’이라는 걸 증명하려는 건지, 아니면 추징금을 확정한 대법원이나 그걸 받아 내야할 정부와의 싸움에서도, 쿠데타를 성공시킨 ‘힘’을 과시하고 싶어서인지 1650여억 원을 내지 않고 버티고 있다.  
 15년 반, 그동안 그는 전 재산 29만 원으로는 불가능한 생활을 해왔다. 그의 자녀들도 그 기간, 그 능력으로 마련이 불가능한 거액의 자산가로 알려졌다. 재임기간에 물가를 안정시키는 등, 일부의 공(功)도 없지 않은 그가, 추징금 납부에 최선을 다 하는 진심을 보였더라면, 그 공(功)을 감안, 국민들은 다만 조금이라도 용서를 했을 텐데, 그는 그 기회를 놓쳤다.
 근자에 들어 새로이 법을 만들어서라도 징수해야한다는 여론이 일고 있지만, 법을 만들기도, 법을 만든 후에도 추징할 방도는 쉽지 않은 모양이다. 검은돈 들어 간 길은 강물에 배 지나간 자리가 되고, 감춰진 돈은 어물쩍 세탁이 됐을 테니 증거를 찾기가 어렵단다. 
 새삼스레 추징을 강조하는 정치권도 민심도 모두 뒷북치기 아닌가 싶다. 힘없는 서민이 단 돈 몇 만 원의 벌금이라도 미납했다면, 그 세월을 그렇게 당당히 버틸 수 있었을까?
 10월이면 추징시효가 만료 된단다. 안 내고 버티는 이에게 부끄러움을 알라고 비난하는 민심이 당연한 것이라면, 부끄러워해야할 이들이 어디 그 이 뿐인가?  ‘정의 없는 포학한 힘’에 굴복했던, 그리고 ’정의’를 지키려다 외롭고 비통한 최후를 맞은 이를 응원하지 못한 국민들, ‘추징’업무를 강 건너 불 보듯, 손 놓고 지나온 이들 모두가 부끄러워해야할 일이다. 
 ‘내라’ ‘못 내겠다’ 당국과 전 전 대통령과의 싸움에서는 과연 누가 승자가 될까? 쿠데타는 ‘정의 없는 포학한 힘’이 승리 했지만, 이번 싸움은 양상이 다르다. 과연 누가 이길까?
 같은 죄목으로 나란히 법정에 섰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부인 김옥숙 여사는, 노 전 대통령이 빼돌렸던 검은돈을 찾아, 미납추징금 237억여 원을 갚게 해 달라고, 검찰총장에게 탄원서를 냈단다. 병상의 남편을 대신해서 늦게나마 고백과 속죄의 길을 택한 셈이다. 버티는 전 전 대통령과 고백과 속죄를 탄원한 노 전 대통령. 확연한 대비요 결말이 모두 궁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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