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논설위원, 소설가)

  원상 씨 귀농한지 1년이 돼간다. 그는 오늘도 농작물과 대화한다. 반 영감한테 얻어 노지에 심은 수박 묘 중에 이상한 놈이 발견됐다. 한 포기에 박과 수박이 달린 것이다. 박 묘에 수박 묘를 접붙인 데서 일어난 현상일 거였다. 한 포기에 한 개를 키워야 한다는 수박 농 전문가의 말에 따르려면 마땅히 박을 따내야 한다. 하지만 그는 고민에 빠졌다. 둘 다 생명이 있는 놈들이고 둘 다 살려고 나온 놈들이다. 더구나 내가 심어놓은  묘이고 내 정성으로 가꿔 맺어진 열매들이다.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차라리 둘 다 박 놈들이라면 둘 다 따버리면 되겠고, 둘 다 수박 놈들이라면 서슴없이 맘 내키는 놈 하나를 따버리면 되련만 이건 박과 수박 따로따로라 박을 남기자니 수박 쪽에선 박만 옹호해 주는 것으로 알 터이고 수박을 남기자니 박 쪽에선 제 놈만 천대를 받는 걸로 알 터이니 사람으로 치면 인종차별로 보지 않겠는가. 그러다 그는 마침내 단안을 내렸다. “얘들아, 어차피 둘 중 하나는 희생을 당해야 하는데 이렇게 해야겠다. 내가 저만치 가서 돌을 던지면 그 돌에 맞거나 돌 가까이 있는 쪽이 당하는 걸로. 어때 공평하지 않냐. 복불복이니까.” 그리곤 그는 돌멩이를 주워들고 대여섯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때 “뭐여, 뭘 그리 혼자 중얼거리는겨?” 하는 소리가 불쑥 들려 왔다. 반 영감이다. “아이, 깜짝 놀랬잖어요. 기척을 하시라니까요.” “기척은 무슨 얼어 죽을 기척, 방안두 아니구 바깥인디. 그리구 지금 집에 혼자잖여. 안식구 안 내려왔잖여. 같은 홀애비끼리 그리 몰아세우지 말게.” “할아버지, 제가 왜 홀애비예요 저 집사람 있잖아요. 할머니 돌아가시구 혼자 된 할아버지가 홀애비지요.” “안사람 백이믄 뭐햐. 혼자 끓여먹구 있는 신세는 마찬가지지 안 그려?” “그 억지 부리지 마시구 다시 또 말씀 드리는데요 제발 인제 느닷없이 쑥 나타나지 마시구 오셨다는 기척 좀 내셔요. 아시겠어요?”

 일전에 원상 씨 아내가 서울 집에서 내려왔을 때다. 막내 학교 마칠 때까지 1년여를 서울 집에 머물면서 가끔 내려오는 아내다. 방에서 두 내외가 농사일이며 애들 일로 심각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중인데 느닷없이 벌컥 방문이 열렸다. 아내가 기절초풍했다. 반 영감이다. “할아버지 똑똑 노크를 하셔야지요!” “노크?” “기척요. 기침 같은 소리라도 내셔야 놀라지를 않지요.” “기척, 얼어죽을 무슨 기척, 왜, 무슨 죄진 일 있남. 무슨 놀랄 일이라도 하고 있었던겨?” “아이 참 할아버지두, 저 봐요 저 사람 새파랗게 질려 있잖아요.” “자네 혼자 있는지 알았지.” “밖에 신발 있는 것두 안 보셨어요?” “누가 신발 보러 오남 자네 보러 오지.” 이런 일이 있어서 그때 몇 번이나 기척 당부를 했었다.
 “그건 그렇구 도대체 뭘 그렇게 혼자 중얼거리고 있냐 말여. 쏘내기 맞은 중마냥. 그리구 손에 든 돌팍은 뭐여. 나 미워서 나한테 던지기라도 할껴?” “ 그게 아니라요….” 원상 씨는 박과 수박에 대한 자신의 갈등을 대략 얘기했다. 그랬더니, “야, 이 사람아, 자네 나한테 얻은 게 박 묘인가 수박 묘인가” 한다. “수박요.” “왜?” “수박 좀 따 먹어 볼까 해서요.” 그러자 반 영감은 구부정구부정 박과 수박한테 가더니 단박에 박을 댕강 따낸다. “할아버지!” “왜, 박이 불쌍햐? 그렇다면 가게. 서울루 돌아가! 자네 시골루 농사 지러 온겨 도 닦으러 온겨? 자네, 밭에 풀은 왜 매주구 잔디밭에 잡초는 왜 뽑는겨. 그것들은 산생명이 아니구 뿔쌍하지도 않단 말여?” 그 서슬에 원상 씨는 반 영감 앞에서 코가 쑥 빠지고 말았다.
 이 후로도 반 영감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원상 씨 집에 들렀다. 아니 수시로 드나들었다. 방에 있을 땐 벌컥 문 열고 들어오고 부엌에 있을 땐 그냥 쑥 들어오는 건 여전했다. 또 밭일할 때도 어느 틈에 슬그머니 와 뒤에 서 있었다. 처음엔 고마운 생각이 들어 약주대접을 했는데 나중엔 짜증이 났다. 그래서 “할아버지, 제 할 일을 잘 못하겠고 제 시간을 갖지 못하겠어요. 이틀에 한 번 사흘에 한 번 오시면 안 될까요.” 했다. 그런데도 통하지 않았다. 달라진 게 있다면 올 적마다 빈손이 아니다. 호미, 낫, 괭이. 삽, 조로 등 집엣 것을 가져오고, 철사도막, 성한 비닐봉지, 못, 하다못해 조막만한 돌멩이까지도 주워와 놓고 갔다. 이러는 걸 보고 앞집 할머니가, “저 자린고비 영감탱이가 참 별일일세. 딸자식 셋 시집 다 보내 놓구 제삿밥이라두 읃어먹을라구 아들택으루 여기나보네.” 했다. 그런데 서울 집에 갔을 때 마침 장모가 와 있어 반 영감 얘길 했더니, “여보게, 업일세, 업. 업두꺼비야 잘 모시게.” 하는 거였다.

오늘은 원상 씨가 업 마중을 하러 일찌감치 문밖으로 나가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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