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준(청양군 목면 부면장)

마을 출장을 나가면 유독 눈길을 끄는 곳이 있다. 금강 변에 있는 우리면 최고령 이장님 댁이다. 사모님이 유별나게 꽃을 좋아하셔서 집 안팎이 온통 꽃 천지다. 그곳을 지날 때마다 가지각색 화사한 꽃들에게 마음이 붙들린다. 길가에 심어놓은 이름모를 꽃들이 지나가는 사람의 마음까지 환하게 해준다. 게다가 앞에는 훤히 트인 금강변까지 펼쳐져 있으니 금상첨화다. 꽃 속에서 바라보는 강변 풍경은 딱 힐링 캠프다.

지난 5월에는 맑은 보라색 큰 꽃 으아리가 폈었다. 으아리는 덩굴성이라서 앞 뜰에 심고 지붕 쪽으로 줄을 매준 모양이다. 꽃을 얼마나 잘 가꾸었는지 큰 항아리만한 꽃무더기가 온 집안을 환하게 만들었다. 이 꽃은 몇 년전 사위가 선물한 거란다. 꽃을 좋아하는 장모와 꽃을 선물하는 사위라. 꽃 자랑하는 소박한 인심에 보는 사람 마음도 흐믓해진다.

사모님은 꽃을 좋아하시는 성품 때문인지 마음이 늘 넉넉하시다. 찾아온 손님을 그냥 보내는 법이 없다. 바쁘다고 그냥가려 하면 서운해 하신다. 안으로 청해서 들어오지 않으면 먹을 것을 가지고라도 나오실 정도다. 내 집에 온 손님 그냥 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어히 차 한 잔이라도 마셔야 비로소 일어날 수가 있다. 그 덕분에 잠시나마 꽃을 바라보며 함께 마음의 여유를 누린다. 꽃을 좋아하면 누구나 그렇게 편안해 지는걸까. 여든 둘 노인의 얼굴이 그토록 평화롭고 인자해 보일 수가 없다.

이장님 댁 외관은 평범한 시골집이지만 인심은 대궐의 품격을 갖췄다. 쌓아놓고 누리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세상인데 마음이 넉넉하니 늘 베풀며 즐겁게 사신다. 그렇게 넉넉한 마음은 꽃을 가꾸는 삶에서 우러나는 여유리라. 본래 꽃이 그렇지 않던가. 달콤한 꿀과 향기를 날마다 찾아오는 벌 나비에게 베풀고 또 베풀어도 스스로 부족함이 없다. 꽃과 함께 살면 사람도 꽃을 닮는 법인가. 두 분의 삶은 늘 꽃처럼 밝고 향기롭다. 


꽃 이야기를 하다 보니 떠오르는 풍경이 있다 언젠가 유럽여행에서 독일에 들렀을 때 일이다. 집집마다 창가에 다양한 색깔의 사피니아 화분이 놓여 있었다. 창가뿐 아니라 기둥에 매달려 있기도 하고 문설주에 걸려 있기도 했다. 눈이 닿는 곳마다 꽃이 장식돼 있는 이국적인 풍경에 금새 매료됐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그 꽃들은 사연이 있단다.

2차 대전 후 독일은 엄청난 혼란에 빠졌다. 패전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이 옳다고 믿어온 합리성의 기반이 한꺼번에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다. 서로 머리를 맞댔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 위해 끝없이 달려온 물질만능주의가 문제였다. 물질에 의한 인간정신의 파괴를 반성했다. 그들은 콘크리트를 걷어내고 꽃을 심었다. 사람들은 꽃을 보면서 마음의 위로를 받았다. 집집마다 꽃을 통해 황폐한 마음을 위로받고 전쟁의 아픈 상처를 딛고 일어날 수 있었다 한다. 풍요로운 마음을 어찌 물질적인 풍족에 비할 수 있을 건가. 문제는 마음이다. 

최근 우리나라가 OECD회원국 중 자살율이 가장 높다는 우울한 기사가 떴다. 우리 지역도 예외가 아닌지 주변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지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소식도 들린다. 안타까운 일이다.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여러 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가 급속하게 고령화되면서 노인들이 노후에 적절하게 대응할 충분한 물질적, 정신적 여유를 갖지 못하면서 불행한 사태를 불러왔을 것이다. 준비되지 못한 고령화시대의 비극이다

무엇이 그들을 삶의 막다른 골목까지 몰았을까. 경제규모 십몇위를 오르내리는 선진국이니 굶어 죽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물질적인 곤궁함보다 더 중요한 요인이 마음의 황폐함일 것이다. 마음 둘 데가 없는 것이다. 돈만 추구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소외를 낳는다. 모든 가치기준이 돈으로 집중돼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상처를 받고 우울해진다. 위로받지 못해 마음이 병든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마음을 회복하는 일이 급하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켜라. 선각자 예수의 가르침이다. 살아가는 일은 마음을 지키는 일인지도 모른다. 물질이 삶을 궁극적으로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세상 것 다가진다 해도 마음 둘 데 없다면 실패한 삶이다. 마음이 넉넉해져야 비로소 삶이 풍요로워 진다.

꽃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해준다. 꽃을 가꾸는 삶에서 사람들은 위로를 받고 마음의 여유를 회복한다. 주변 외로운 분들에게 꽃을 한그루씩 선물해보자. 힘들고 지친 마음속에 생명의 꽃이 다시 피어나게 하자. 소중한 삶을 지키는 일... 한그루의 꽃을 가꾸는 일에서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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