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복(흥덕새마을금고 이사장)

 ‘행복’의 사전적 의미는 욕구가 충족되어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는 상태라고 표현돼 있다. 오늘날 우리는 국민소득이 2만 불을 넘어 풍요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행복하다는 말보다 오히려 그렇지 않다는 소리가 많이 들린다. 인간 삶의 원류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선각자들이 행복의 본질에 대하여 무수히 많은 이론들을 설파 했지만 그분들 역시 진정 행복에 이른 삶을 살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근 현대에 이르러 행복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장한 사람은 영국의 도덕 철학자이자 법 개혁가인 ‘제러미 벤담’으로 공리주의를 주창했는데, 모든 도덕은 인간행복의 극대화를 전제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공리란 쾌락이나 행복을 가져오고 고통을 막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가리킨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저런 행복을 갈망한다. 또 행복에 대한 크기나 바람도 사람들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별 대수롭지 않게 지나는 일상도 다른 사람에게는 다시 올 수 없는 행복 자체로 여겨지기도 한다. 
 심리학자들 연구에 의하면 인간은 원하던 것을 손에 넣었을 때 잠시 행복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나면 처음의 기쁨은 곧 사라지고 새로운 갈망이 시작된다고 한다. 이러한 현상을 권태라 하는데 권태가 수반되지 않는 진정한 행복을 얻으려면 시간이 경과해도 처음 기쁨이 퇴색되지 않는 대상을 획득해야 한다. 인간 누구나가 추구하는 필연적 행복의 대상은 돈이나 명예 같은
것이 아니라 사상, 지식, 철학, 재능과 같은, 함께 공유함으로써 더욱 빛나고 변하지 않으며 끊임없이 새로운 가치를 창조해내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값이 아니라 내면에 침잠해 있는 가치가 중요하다. 그러므로 인간이 궁극적 행복의 혜안에 이르는 길은 분출을 통한 갈망에 기대서가 아니라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실존적 자아의 충족을 통해서다.   인간은 누구나 혹은 무엇인가에 대한 목표와 이를 성취하고자 하는 내면의 욕망이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목표지향적인 행복만을 추구하다보면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끊임없이 충족돼야하는 욕구에 함몰되고 어느 순간 스스로 그 욕구를 통제할 길이 없어진다. 인간의 욕망은 사다리를 오르는 것처럼 끝이 없는데, 한쪽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또 다른 욕망이 생겨남으로 영원히 맞닿을 수 없는 평행선처럼 욕망에 대한 결핍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경제학자 ‘폴 새뮤얼슨’은 행복을 가진 것(소유)으로 규정했다. 즉 가진 것을 늘리거나 갖고자 하는 욕구를 줄이는 것이 행복의 척도라는 의미다. 글로벌 행복지수를 조사해보면 전 지구상에서 가장 행복지수가 높은 민족은 히말라야 산자락에 살고 있는 조그만 나라 ‘부탄’이라고 한다. 그들은 우리가 행복 지표로 비유하고 있는 돈, 명예, 재산 뿐 아니라 전기나 자동차 같은 기본적 문명의 혜택도 별로 누리지 못하고 있으며 물질적 소유 또한 풍족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결국 인간의 행복은 눈에 현시되는 결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과 그것을 지각하는 심리적 요인에 있음을 알게 된다. 따라서 행복 이라는 목표에 도달하기위한 과정도 중시해야 하는 이유다.   
 요즘처럼 돈, 자동차, 주택 등 물질적 요인이 행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 사회에서는 인간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역시 매우 다양해졌다. 따라서 과거에 비해 훨씬 풍족해진 지금이 보다 더 행복해야 하는데 평가는 그렇게 나타나지 않는다. 또 부유한 나라 국민들이 그렇지 못한 나라 국민보다 더 많은 부문에서 행복해야 하건만 전혀 다른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볼 때 물질적 풍요와 행복한 삶과의 인과관계는 같다고 할 수 없다. 과거 우리가 행복의 절대적 요소로 믿었던 것들이 시간의 경과에 따라 바뀌고 있다. 결론적으로 행복에 대한 절대적 가치는 물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개개인의 사고와 인식체계에 있다고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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