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기업이 1940년대 강제 징용 피해자에게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은 10일 여운택(90)씨 등 4명이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에게 각 1억원과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여씨 등은 1941~1943년 구 일본제철의 회유에 따라 일본에 갔으나 오사카 제철소 등에서 자유를 박탈당한 채 임금도 제대로 못 받고 고된 노역에 시달렸다며 1인당 1억원의 위자료를 청구하는 소송을 지난 2005년 냈다. 앞서 1·2심은 모두 원고 패소로 판결했으나 대법원이 작년 5월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내 소송 8년 만에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받게 됐다. 이들 중 2명이 1997년 일본에서 소송을 냈다 패소한 것까지 감안하면 무려 16년간의 기나긴 법적 분쟁 끝에 얻어낸 승소 판결이다. 아흔을 넘은 여씨는 판결 후 "18살에 일본에 가서 죽을 고비를 넘겼다. 나처럼 원한 맺힌 대한민국 국민이 몇 명이나 더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꽃다운 청춘을 강제징용으로 보내고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법적 분쟁에 매달려야 했을 피해자들의 고통이 오죽했으랴. 늦게나마 올바른 판결이 내려진 게 다행이고 이제 신속하게 배상이 이뤄져야 할 차례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일제 징용 피해자의 보상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에 의해 완전히 해결됐다고 되풀이 주장해왔다. 하지만 일본이 이 협정에 따라 한국에 제공한 무상 3억달러와 피해자들의 청구권 문제와는 인과관계가 없다는 게 우리 법원의 판단이다. 따라서 피해자들의 개인청구권은 당연히 유효하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일본이 1965년 협정을 체결하기 전 한국의 대일 청구권 금액을 계산하면서 일제 강제동원에 대한 사죄나 배상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당시 일본측 한일회담 문서를 통해 드러났다는 일본 언론의 보도도 있었다. 또 신일본제철은 구 일본제철과 법적으로 동일한 회사로 평가돼 청구권 시효가 소멸됐다는 주장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법원은 판단했다.
지극히 합당한 우리 법원의 판결에도 불구하고 일본 정부와 기업이 이를 그대로 수용할 가능성은 높지 않아 보인다. 일본이 최근 일제의 침략마저 부정하려 하는 등 과거사 문제에 퇴행적 태도를 보이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이처럼 일본측의 자발적인 반성과 사죄, 배상을 기대하기 힘든 상황이라면 우리 정부가 적극 나서는 수밖에 없다. 외교부를 주축으로 정부 차원의 종합대책을 마련해 일본측이 배상 판결을 이행하도록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헌법재판소는 우리 정부가 일본측과 위안부 문제를 협상하지 않는 것 자체가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린 바 있다. 법원이 내린 배상 판결을 일본측이 이행하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것 또한 우리 정부의 의무이다. 일본과 달리 독일 정부는 얼마 전 나치정권의 피해자들에게 10억달러의 신규 지원금을 지급키로 해 대조를 보였다. 독일은 앞서 1952년부터 나치피해자들에게 무려 700억달러 이상의 배상금을 지급했지만 새로운 피해 사실이 드러나면 지금도 배상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거의 50년 전 달랑 3억달러를 낸 것으로 모든 배상이 끝났다는 일본측의 부당한 주장을 더 이상 용인할 수는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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