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준(청양군 목면 부면장)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을 읽었다. 직장독서클럽의 추천도서였는데 인터넷으로 주문한 책이 도착하자마자 삽시간에 읽어 버렸다. 짧은 글이었다. 게다가 편집도 단순해서 한 페이지에 열 줄을 넘지 않았다. 문장은 간결하고 메시지는 선명했다. 담담한 잠언같은 느낌이었다.

 

저자는 40여 년 전 알프스 프로방스 고산지대로 여행을 떠났다. 도보여행이었다. 야생 라벤더 외에는 아무것도 자라지 않는 황무지 땅. 우물을 찾아다니던 중 그는 쉰 다섯살의 양치기를 만난다. 이야기의 주인공 엘제아르 부피에다. 부피에는 황무지에 나무를 심는 사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죽고 아내마저 세상을 떠나고 홀로 고독 속에서 그는 주변에 나무를 심었다. 누구의 땅인지도 몰랐다. 단지 메마른 황무지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는 매일 쉬지 않고 나무를 심었다. 

 

주변에는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드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부질없는 욕심만 키워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경쟁했다. 숯을 파는 것을 두고, 교회에서 앉는 자리를 놓고서도 경쟁했다. 선한 일을 놓고, 악한 일을 놓고, 그리고 선과 악이 뒤섞인 것들을 놓고도 서로 다투었다. 자살이 전염병처럼 번지고 여러 정신병마저 유행하여 사람들이 목숨을 잃는 곳이었다.

 

부피에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지팡이 대신 들고 다니는 1.5m의 쇠막대기로 척박한 땅에 구멍을 뚫었다. 밤새 정성껏 골라놓은 도토리를 물에 불려 두었다가 구멍마다 하나씩 넣었다. 떡갈나무 씨였다. 3년 동안 도토리 10만개를 심어 2만개가 싹이 나고 그 중 1만개정도가 살아 남았다. 1/10 생존확률이었다. 그는 30년 후의 펼쳐질 아름다운 떡갈나무 숲을 꿈꾸며 역경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계속했다.

 저자는 세계대전에 참전하고 나서 떡갈나무가 궁금했다. 그는 다시 부피에를 찾았다. 그는 부피에보다 더 크게 자란 아름다운 떡갈나무 숲을 만날 수 있었다. 너도밤나무와 자작나무도 있었다. 숲이 만들어진 후 황무지였던 땅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옛날에 말라버렸던 샘들이 다시 흐르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모였다. 건강한 남자와 여자들, 그리고 밝은 웃음을 터트리며 시골축제를 즐길 줄 아는 소년소녀들을 길에서 만날 수 있었다. 지혜로운 부피에 덕분에 1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꿈같은 마을을 이루고 살게 되었다는 해피엔딩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나무를 심은 사람’은 저자가 프로방스지방을 여행하다가 실제 경험한 이야기를 쓴 것이라 한다. 초고를 쓰고 20년 동안이나 다듬었다. 1953년 리더스 다이제스트지에 발표되고 54년 보그지에 의해 ‘희망을 심고 행복을 가꾼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 후 13개국 언어로 번역되어 세상에 퍼졌다. 한글판 나무를 심은 사람도 그 중 하나다.

  

작품은 같은 제목의 에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됐다. 화가 프레데릭 바크가 5년 동안 2만장의 그림을 그리고 캐나다 국영방송에서 제작을 맡았다. 국제에니메이션 상을 받았고 제60회 아카데미상 단편상을 받았다.

 

인간은 어느 시대나 비슷한 문제를 안고 살아가는 존재인가 보다.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서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풍자들을 발견한다. 이 시대에도 과연 ‘나무를 심은 사람’이 가능할까. 비관적이다. 아무런 보상없이 남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한다는 게 도대체 불가능한 시대다. 부피에의 소박한 믿음이 사라진 자리에 황금만능주의가 등극했다. 돈을 향한 맹목적인 효율만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부피에는 생각이 다른 사람이었다. 그가 발견한 것은 긴 안목으로 세상을 볼 줄 아는 지혜였다. 나무를 베는 마을 사람들이 작은 이익에 골몰하며 서로 싸우고 있을 때 그는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혼자 조용히 나무를 심었다. 결국 그의 희망대로 황무지에 샘이 흐르고 꿈같은 마을이 들어섰다.

 
역사학자 전우용은 사람을 세 가지 그릇에 비유했다. 성인의 그릇은 온 천하를 담고, 군자의 그릇은 한나라를 담고, 소인의 그릇은 저와 제 패거리만 담고. 악인의 그릇은 제 한 몸 집어넣기도 벅차다고. 황량한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은 사람의 그릇을 키우는 일이다. 그릇의 크기는 교육을 통해서 이뤄지고 교육은 책을 통해서 실현된다. 세상이 점점 각박해지는 것은 책을 읽지 않는 우리 풍토와 무관하지 않다. 그 결과 제한 몸 집어넣기 벅찬 그릇들이 넘쳐나는 세상이 되었다. 나무를 심는 일도 중요하지만 나무를 심는 사람을 키우는 일은 더 중요하다.

이 시대에 희망을 품고 나무를 심는 사람은 누구일까. 아마 책을 읽는 사람일 것이다. 책은 생각하는 사람을 만들고 그 생각을 통해 결국 세상이 조금씩 변한다. 책은 황무지같은 세상을 바꿀 희망의 도토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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