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팔(논설위원, 소설가)


 기중 씨 집안에 비상이 걸렸다. 그래서 기중 씨가 비상연락망을 찾아 휴대폰으로 서울, 부산, 대전 찍고 청주를 제일 나중에 눌렀다. 이렇게 형제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다. 다짜고짜로 ‘빨리 와!’ 이니 통화시간이 고작 10여분밖에 안 걸렸다. 하지만 다 모이는 데는 4시간이나 걸렸다. “뭐야 오빠, 할아버지 어떻게 되셨어?” 제일 가까우면서 제일 늦게 도착한 막내 누이동생이 들이닥치자마자 호들갑이다. 이걸 본 먼저 온 오빠언니들이, “그래 할아버지께서….” 채 말끝도 맺지 않았는데, “할아버지가 어떻게 되셨다구, 우리 할아버지가 그렇게나 위독하시다는겨. 할아버지, 할아버지!” 금세 눈물까지 글썽이며 할아버질 찾는다. 이때, “나, 여기 있다.” 할아버지다. 할아버지가 건넌방문턱을 구부정히 넘어서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막내만 놀란다. “끝녀까지 왔구나. 앉그라 앉그라. 이 할비 아직 안 죽었다. 금방 죽을지 알구 다들 모였는가 본데 이렇게 아직 성하잖여. 죽는거 그거 대단히 어려운겨. 내가 여태꺼정 살어 있어봉께 알겄어. 일찍 떠난 사람들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나 참 대단한 사람들여. 그 어려운 걸 해버렸으니….” 할아버진 당신 앞서 세상을 등진 할미와 자식내외를 두고 하는 말이다. 할머닌 7년 전에 세상을 떴다. 80세 때였다. 여름장마 때, 자식내외가 봄에 산기슭에 심어놓은 과수묘목이 염려돼 도랑을 치러 나갔다가 산사태가 나 둘 다 묻혀 버렸다. 이렇게 60을 갓 넘긴 이들 동갑짜리 자식내외를 졸지에 앞세운 할머닌 그로 인한 실심을 이겨내지 못하고 그 이태 후 가신 것이다. 하여 할아버진 이때부터 89세가 된 지금까지 맏손자인 기중 씨가 모시게 되었다. 할아버진 계속 말을 잇는다. “할매도 그렇고 니들 어무이 아부지도 그렇고 또….” 할아버진 여기서 말을 끊는다. 실은 ‘또’ 다음엔 며칠 전 하나 남았던 또래친구마저 가버린 것을 두고, ‘그놈도 나를 두고 용감하게, 대담하게 그 어려운 일을 치렀는데 난 왜 이리 쫌팽이가 돼 죽지도 못하고 요 모양이 돼 있는지 모르겠다.’ 는 말을 하려던 거였다. 하지만 할아버진 잠시 머뭇거리다 “에잇, 아니다 나 이만 들어갈란다.” 하고 미련 없이 홱 돌아서는 것이다. “할아버지 왜 저러셔. 그렇게도 말수가 없던 분이셨잖어. 두서없이 말 줄이 길으시네 이상하시네.” 막내가 놀란 표정이다. “막내 니도 시방 봤제 아까부터 우리한테도 그러셨어.” “그래서 내가 동생들을 부른 것이여. 저러시니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겄어?” 이에 모두가 시무룩이 있는데 둘째가 나선다. “십여 년이 가깝도록 홀로 계니니 심신이 허하시고 외로우셔서 그러실껴. 말벗이라도 하게 해금이 할머님을 좀 모셔오는 게 어떨까!” “그러게, 그 할머니 참 우리 할아버지하구 동갑이시잖여. 그것 참 좋겠다.” “아따, 오빠들 시방 그걸 대책이라구 내세우는겨. 그 할머니 잘도 오시겠우. 새댁 적부터 이날이때꺼정 내외하느라 할아버지하구 눈 한 번 안 맞춰본 사이유.” “그리유. 설령 오신다구 합시다. 말벗은커녕 서로 꿔다 논 보릿자루루 단 하루가 고역들일 거유.” “그렇게만 생각할 게 아녀. 그 할머니 벌써 이십 년 전 혼자 되셨으니 우리 할아버지처럼 기운두 정신두 허하셔서 많이 변하셨을지 몰러.” “극노인네들 급작히 기력 쇠하구 맘 변하믄 오래 가지 못한다는 징조유. 이제 이런 마당에 뒤늦게 해 봐야 아무런 효험 없을 게 십중팔구유.” “아니 그럼 아무런 대책이 없다는겨 뭐여?” 이때 막내가 불쑥 나선다. “할아버지 올해 여든아홉이시잖아. 맞아, 아홉수라 그래 아홉수라, 올해만 넘기면 괜찮아지실껴.” 무슨 큰 대책이라도 강구한 양 의기양양하다. “얘, 그건 텔레비에서 두 못난이들이 나와서 하는 소리잖어!” 그러고 보니까 방으로 들어가실 때의 할아버지 엉덩이가 뒤뚱뒤뚱 실룩실룩 대고 있는 것도 같았다. 결국 이들은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며칠 후, 해금이 할머니 댁에도 형제들이 모였다. 도대체 할머니가 딴 사람이 돼 있다는 거다. “니네들 나보구 이번 아홉수만 넘기면 맘 편해질 거라 하는디 다 부질없다 팍 죽어버릴껴.” “기중이 할아버지가 요새 맘이 확 변하셨다더니 엄니까지 왜 이러셔요?” “뭣여, 그 할배도 죽어야겠댜. 그럴 게다. ‘널널이 바다는 메울 수 있어도 사람의 욕심은 못 채우는 벱이다. 내도 이쯤에서 욕심 다 내려놓고 팍 죽어삘란다.” 이 어거지에 대책이 없다.

 그날 해거름에 이 아홉수 두 노인들이 지팡이를 짚고 동네 고샅 중간쯤에서 서로 마주쳤다. 하지만 여태껏 그랬듯이 서로 거들떠도 보지 않고 그냥 지나간다. 그리곤 고샅 양 끝머리에서 둘이 동시에 돌아서 서로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전엔 없던 일이다. 이러는 이 둘의 속내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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