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윤호 문학평론가, 조명희 시 초판본 수정없이 수록
대표작 원문 62편 실려… 항일 민족의식 등 고스란히

대한민국 최초의 창작 희곡을 썼다. 카프 문학의 선구자였고 그의 시집은 출간된 근대 창작 시집으로는 첫 번째나 다름없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잊혔다. 도쿄에서도 조선에서도 소련에서도 디아스포라였던 식민지의 청년은 오랫동안 대한민국에서도 갈 곳을 찾지 못했다. 보들레르도 타고르도 아닌 그저 조선 혼의 울음소리를 노래하는 시인이 되고 싶었던 포석 조명희(趙明熙·18941838). 이제 그의 시가 본향을 찾는다.
조명희 시선이 지식을만드는지식에서 발간됐다. 이 출판사는 점점 사라져 가는 원본을 재출간하겠다는 기획 의도에 따라 초판본 한국시문학선집을 발행하고 있다.
한국문학평론가협회에서 작가 100명을 엄선해 책으로 엮고 있는 가운데 조명희 선생이 선정된 것이다.
조명희 시인 연구로 학계에서 권위를 인정받은 이화여대 교수인 오윤호 문학평론가가 직접 작품을 선정하고 원전을 찾아냈으며 해설과 주석을 덧붙여 조명희 시선을 엮었다. 책에는 포석 선생의 대표작 62편이 실렸다.
작품들은 초판본을 수정 없이 그대로 타이핑해서 실었다.
초판본을 구하지 못한 작품은 원전에 가장 근접한 것을 사용했다.
저본에 실린 표기를 그대로 살렸고, 오기가 분명한 경우만 바로잡았기 때문에 포석 선생의 작품을 원전 그대로 만날 수 있다.
내가 이 잔듸밧 위에 노닐 적에/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보아 주실 수 읍슬가//어린 아기가 어머니 젓가슴에 안겨 어리광함갓치/내가 이 잔듸밧 위에 짓둥그를 적에/우리 어머니가 이 모양을 참으로 보아 주실 수 읍슬가//밋칠 듯한 마음을 견데지 못하여/‘엄마! 엄마!’ 소리를 내엿더니/우애!’ 하고 한울이 우애!’ 하옴애/어나 것이 나의 어머니인지 알 수 읍서라.’
봄 잔듸밧 위에전문이다.
이 시는 포석의 첫 번째 시집의 표제시다. 시집 봄 잔듸밧 위에는 대한민국 세 번째 시집이지만, 첫 번째 시집으로 볼 수도 있다. 첫 번째 시집으로 알려져 있는 김억의 시집은 번역 시집이고, 이후 나온 이학인의 시집은 출간 전에 출판 금지됐기 때문이다.
포석 선생은 1894810일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에서, 선비이며 학자인 아버지 조병행과 연일 정씨 어머니 사이에서 4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는 경덕(景德), 호적명은 명희(明熙), 애칭은 칠석이었다.
1914년 한여름, 서울중앙고등보통학교 졸업반이었던 조명희는 북경사관학교로 떠나려다가 평양에서 둘째형 경희에게 잡혀 집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이 시기에 다양한 신소설을 읽었고, ‘홍루몽’, ‘삼국지등 많은 중국 소설도 접하게 된다.
19193월 초, 3.1 만세 운동을 하다가 유치장에 갇히고 난 후, 조명희는 5년간의 고향 생활에서 벗어나 일본 도쿄로 가 도요대학 인도철학윤리학과에 입학한다. 경제적 사정과 언어 소통, 문화 차이의 어려움을 겪으며, 학비 문제로 고생하게 된다. 그런 와중에도 괴테를 읽고 타고르와 하이네를 읊었다. 친하게 지내던 극작가 김우진과 함께, 1920년 봄 도쿄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본격 근대극 연극 단체인 극예술협회를 창설한다. 1921년 여름에는 유학생과 노동자들의 모임인 동우회의 전국 순회 연극단의 공연 작품으로 조명희가 쓴 김영일의 사가 채택되어 크게 호평을 받았다. 이 연극 대본은 한국 근대 문학 최초의 창작 희곡으로 가난한 도쿄 유학생의 비극적 삶을 그린 조명희 시인의 자전적 작품이다. 친구들과 연극 운동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조명희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학업을 중단하고 3년 반 만에 식민지 조선으로 돌아오게 된다. 귀국 다음 해에 상경해 조선일보 기자로 일하고, 노적(蘆笛)이라는 아명으로 시집 봄 잔디밭 위에를 출간하게 된다.
일본에 가기 전 고향집에서 썼던 시들과 도쿄 유학 시절의 시들을 모은 이 시집은 근대 문학 사상 개인 창작 근대 시집이다.
19288월 조명희는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다.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이전의 서정시와는 다른 분위기의 산문시 짓밟힌 고려조생이란 필명으로 세상에 발표하게 된다.
이 시는 일제에 대한 강한 저항 의지를 담고 민족 해방과 계급 투쟁을 과감하게 드러내고 있다.
조명희는 1938년 일본 간첩으로 몰려 총살 당했으나 1956년 스탈린 사후 흐루시초프 정권 때, 소련 극동군관구 군법회의는 이 결정을 파기, 무혐의로 처리하고 조명희를 복권시켰다. 19591210일에는 조명희문학유산위원회에서 편찬한 조명희 선집이 소련과학원 동방도서출판사에서 양장본으로 출간되었다.
1988년 한국 정부가 월북납북작가 작품을 해금 조치함으로써, 조명희에 대한 문학적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식을만드는지식, 149, 16000. <김재옥>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