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옥

             운호고 교사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날들에 대한 기억에서 자유롭지 못한가보다
.

때로는 잠시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 아픈 기억이 있고, 문득 스치는 향기에도 함박웃음 머금게 하는 추억도 있다.

도시에 위치한 H학교에 부임했을 때, 나는 30대 중반이었고, 2학년 담임을 배정받았다.

언제나 학기 초 학생들과의 만남은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이 있다. 32, 첫 아침 조회를 하러 교실에 들어가 보니, 볼이 발그레한 상냥한 얼굴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얘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그 잔잔하고 싱그러워 보이는 여고생들의 모습에 내 마음도 한껏 여고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은 일종의 폭풍전야였고, 그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채 한 달이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동료 교사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우리 반이 일종의 문제 반이었다고 한다.(어떤 커다란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다른 반에 비해 비교적 말썽꾸러기들이 좀 많이 배정된 반) 그 말을 반증이라도 하듯, 지각을 밥 먹 듯 하는 학생, 머리에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학생, 틈만 나면 조퇴할 궁리는 하는 학생, 무단으로 결석 하는 학생, 무슨 말을 하든 반항적으로 달려드는 학생.

한 학생을 지도하면, 다른 학생이 문제를 일으키고, 여기서 일이 터지면, 저기서 또 일이 터지고, 좌충우돌 그렇게 3개월이 지나니,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어서 이젠 서로의 눈빛만 봐도 무엇을 말하려는지, 어떤 마음인지를 알게 되었을 무렵, 나는 출산을 위해 휴가원을 내게 되었다.

휴가를 앞두고, 임시 담임선생님께 우리 반 학생들의 일반 자료와 갖가지 상담 기록을 전해드리고, 학생들에게는 다음 주부터 출산 휴가를 가게 되었다고 말하며, 임시 담임선생님을 소개해드렸다.

잠시 동안의 이별이었지만, 학급 학생들에 대한 걱정이 앞섰다

마지막 날 종례를 하려는데, 반장이 앞으로 나와서 앙증맞은 케이크에 촛불 한 개를 켜놓고 아기의 탄생을 미리 축하한다며, 학급 학생들과 함께 생일축하 노래를 불러주었다.

나는 그 순간 너무도 행복했고, 가슴이 뭉클했다. 이런 마음은 선생이 아니고서는 느껴볼 수 없는 보람이었다. 순산을 기원한다는 박수소리를 뒤로하고 교실을 나와 교무실에 들어왔을 때, 나는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내 책상위에 두 팔을 펼쳐도 닿지 않을 만큼 기다란 대장각 미역과 한 아름으로도 부족한 커다란 늙은 호박이 떡하니 올려져있는 게 아닌가? 나는 놀랍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그때만 해도 내가 젊었으니까 내 주위에는 나보다 선배 선생님들이 많이 계셨고, 늘 조심스럽게 생활하고 있을 때였다.) 얼른 미역과 늙은 호박을 들어 아래도 내려놓았다.

그러나 그 고마움의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던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 엉엉 울고 말았다. 교무실에 계셨던 선생님들이 일제히 박수를 쳐주셨고, 2학년 3반 만세를 외쳐주셨다.

3개월 동안의 고군분투(?)가 눈 녹듯이 녹아내리는 순간이었다. 그 후 나는 건강하게 막내를 출산했고 3개월 후 가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우리 반 학생들과 다시 만났다. 3학년으로 진급하기 전까지 사랑과 전쟁을 거듭하며, 그러나 알콩달콩 소소한 행복을 가꾸며 우리는 찬란한 삶의 한 순간을 신뢰로 엮어갔다. 그때 2학년 3반 누나들의 축복 속에 태어난 아이가 지금 고 1이 되었으니, 세월은 참으로 빠르기만 하다.

올 여름은 유난히 덥다. 맛깔스런 반찬거리가 없을까 생각하며 며칠 전 재래시장을 갔었다.

여기 저기 좌판에는 손수 농사를 지어 따오신 애호박이며, 오이, 풋고추, 호박잎, 깻잎 등이 싱그럽게 놓여 있었다. 그때, 나는 문득 늙은 호박을 생각했고, 한 할머니께 요즘도 늙은 호박이 나오냐고, 살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할머니는 웃으시며, ‘아니 이 한 여름에 무슨 늙은 호박이냐, 손사래를 치셨다. ! 그랬었구나! 도대체 그 때 우리 반 학생들은 어디를 얼만큼 헤메다가 그 귀한 한 여름의 늙은 호박을 구해왔을까? 육거리 시장일까? 북부시장일까? 아니면 어느 집에서 출산을 앞 둔, , 며느리를 위해 정성껏 보관해오던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한 여름 햇살이 기울어가는 서쪽하늘을 바라보며, 노을보다 더 붉고, 동그랬던 그 여름의 늙은 호박이 떠올랐다.

다시금 가슴이 뭉클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 동네에 같이 살았던 반장 명숙이, 노란 머리 순이, 반항적이었던 눈빛을 햇살 가득한 미소로 바꿔 준 경식이, 졸업 후, 예쁜 숙녀가 되어 찾아왔던 남례. 나와 맺어진 이 소중한 인연이 있었기에 나의 지난 시절 추억이 이토록 아름다운가 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