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복(흥덕새마을금고 이사장)

 입추(立秋)와 말복이 지났다. 며칠 후면 처서(處暑)다. 그럼에도 한 낮은 30도를 훨씬 웃도는 고온이 계속되고 있다. 기상청 관측에 의하면 북태평양 고기압이 강하게 확장해 한반도 상공에 이상고온이 이불처럼 띠를 만들어 폭염(暴炎)과 열대야(熱帶夜)가 상당기간 지속된다고 발표했다. 예년에 볼 수 없었던 지독한 폭서(暴暑)가 수십일 째 계속되고 있다.

 자연의 섭리(攝理)는 우주만물이 질서 속에 조화를 이루며 순행한다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엔 그러한 진리도 무색해진다. 봄이 지나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 겨울이 오겠지만 당연히 순서대로 와야 할 계절이 실종이라도 된 듯 폭염의 기세가 전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장장50일에 걸쳐 이어졌던 장마와 이상고온이 그렇다.

 물론 뜨거운 여름이 있어야 풍성한 과실을 맺고 그 과실이 탐스럽게 잘 익는다는 것을 안다. 농부 얼굴에 흐르는 굵은 땀방울이 풍년을 기약한다는 것도 안다. 그래도 시원한 계절이 간절히 그리워지는 걸 어쩌랴.

 무더위에 지친 여름날에 맞는 과실은 뭐니 뭐니 해도 수박이다. 잘 익은 수박은 껍질 색과 무늬가 선명(鮮明)하고 밑바닥 꽃핀 자리가 작으며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탱탱해 칼끝이 살짝만 스쳐도 쉽게 갈라진다. 빨갛게 익은 과육을 한입 가득 베어 물면 혀끝에 스미는 달콤한 과즙이 전신에 상쾌하게 퍼진다. 수박은 땀을 많이 흘리고 난 뒤에 먹어야 더욱 제격이다. 먹고 나면 뱃속뿐 아니라 머리까지 청량음료(淸凉飮料)처럼 시원하고 편안해 지면서 좀 전까지 느꼈던 폭염은 어느덧 아득히 사라진다. 아삭아삭 씹히는 식감 때문에 다른 과일을 곁들여 화채로 만들어 먹어도 좋다. 수박 성분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이뇨작용을 원활하게 하는 수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비타민 A.B.C, 칼슘, 칼륨, 리놀렌산, 시트롤린, 등의 영양성분 또한 풍부하다. 특히 동맥경화(動脈硬化)나 고혈압에 좋고 소화흡수가 편해, 영 유아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두루 사랑받는 대표적 여름 과실이다.

 요즘처럼 장기간 폭염에 노출되면 우리 몸은 제대로 적응을 하지 못해 이상증세(異狀症勢)를 나타낸다. 땀을 많이 흘리게 되어 탈수증세가 심해지고 심신이 늘어져 복통이나 설사가 나기 쉽다. 고온에 따른 증상은 이뿐만이 아니다. 숙면(熟眠)을 이루지 못해 종일토록 정신이 몽롱하거나 두통에 시달리며 일에 대한 집중력이 떨어져 사고(思考)에 균열을 일으킨다. 또한 불쾌지수가 높아져 괜히 짜증을 낸다. 평소 잘 먹던 음식도 먹지 못하는 등 무더위는 신진대사 작용을 무디게 해 건강을 해치게 만든다.

 여름한철 더위로 잃은 입맛을 살리는 데는 된장찌개만 한 것이 없다. 반들반들하게 윤기 나는 애호박을 따다가 나박나박 썰어 뚝배기에다 된장과 함께 듬뿍 넣고, 마늘 다진 것, 참기름, 대파를 숭덩숭덩 썰어 넣어 한껏 버무리고 나서, 미리 받아두었던 쌀뜨물로 보글보글 실하게 끓이면 맛이 되직해진다. 이때 밭에서 갓 따온 싱싱한 풋고추를 칼로 썰지 않고 손으로 뚝뚝 잘라 넣어 한소끔 더 끓이면 국물이 한층 칼칼해지고 감칠맛이 난다. 식성에 따라 멸치나 양파 등을 첨가하면 간도 잘 맞고 맛도 한결 그윽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반드시 집에서 담근 강된장 이어야 한다. 또 밥솥에 얹어 부드러워진 호박잎을 된장에 싸먹으면 그야말로 밥도둑이 따로 없다. 마치 오랜 기다림 끝에 얻은 것처럼 마음까지 흐뭇하고 나른해진다.
 현대인은 각박(刻薄)한 도시생활에 쫓겨 인스턴트나 기름진 음식에 익숙해져있다. 그러다보니 오장육부가 과민해져 아랫배가 늘 묵직하고 탈이 잘난다. 이럴 때 소박한 된장찌개는 들뜬 비위를 가라앉히고 간사해진 혀가 제자리를 잡는데 안성맞춤이다. 더위에 지친 심신을 값비싼 보약에만 의지할 것이 아니라 선인들의 지혜를 살려봄이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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