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사)

 

 얼마 전 내가 속해 있는 갤러리에 손님이 왔다. 현재 대학교수로 있으면서 과거에 외국계 회사 CEO생활을 오래 한 경력이 있는 분이었다. 이미 몇 번 갤러리에 온 적이 있는 그는 흔쾌히 마음에 정해 둔 그림을 샀고 마침 저녁 때가 되어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다른 갤러리 직원들과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 그가 독일에서 유학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베를린에서 십년 정도 공부를 했다는 그는 독일생활 중 일화를 재미있게 소개했고 독일인들이 즐겨 먹는다는 허브를 주원료로 만든 작은 병에 담긴 소화제용 술을 우리에게 건넸다.

 독문학을 전공한 나는 당연히 친근감을 갖게 되었고 그의 얘기를 더 유심히 듣게 되었다. 그는 독일인들이 얼마나 검소한지 얼마나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지 실 예를 들어가며 설명해 주었고 산책을 즐기는 독일인들이 산책을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게 현재의 독일을 만든 힘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알고 보니 그는 “강아지 똥”이라는 애니메이션 제작자이기도 했다. 흥미있게 그의 대화를 들으며 모처럼 신선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고 그동안 잊혀졌던 독일에 대한 그리움이 살아났다.

 며칠 뒤 그로부터 이메일 한통을 받았다. 독일어로 쓴 편지였다. 너무도 오랫 동안 잊고 지냈던 독일어라 간신히 내용파악을 할 정도였지만 의미전달에는 무리가 없었다. 아련한 감동에 젖어 그의 편지를 읽고 또 읽었다. 그 또한 독문학을 전공한 나를 만나 기뻤고 의미있는 시간이었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그에게 답장을 하다 보니 지난 시절 일들이 아련히 떠올랐다.

 철학을 전공하려다 독문학을 전공으로 택한 나는 대학시절 독일적인 것에 열광하며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본격적인 전공 공부가 시작되던 2학년 때부터 독일문학에 열정적으로 파고 들었다.

 새로운 단어를 하숙방 벽에 빼곡하게 붙여놓고 매일 몇 바퀴씩 돌며 암기했다. 주기적으로 새 단어로 교체가 되었고 이미 확실하게 암기가 된 단어들은 따로 노트에 정리를 해 두었다. 나의 단어도배 방법은 매우 효과가 있어 독일어휘에 관한한 어딜가도 빠지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토마스만, 괴테, 하인리히 뵐 등 많은 독일작가들의 작품을 읽었고 특히 헤르만 헷세에 심취해 그의 작품은 거의 원서로 읽었다. 헷세의 동양적인 사상은 내게 깊이 파고 들었고 헷세를 통해 동양적인 것에 대한 애정을 키웠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헷세의 시 ‘안개’를 떠올리면 당시의 감동이 솟구쳐 오른다. 언젠가 ‘헷세와 나’란 글에서 헷세가 얼마나 내 삶에 깊은 영향을 주었는지를 피력하기도 했다. 누가 뭐래도 헷세는 내 삶의 큰 스승이었다.

 독일어 교사를 하며 독일유학을 꿈꾸던 나는 서울 남산에 있는 독일문화원을 오르내리며 독일어 회화공부를 했고 열심히 노력하여 당시 큰 불편 없이 독일어를 구사하기도 했다. 당시 그룹사운드 ‘징기스칸’이 부르던 독일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좋아했고 다른 독일 가수들의 노래도 마찬가지였다. 우연히 독일 보쿰에 사는 갤러리 운영자를 알게 되어 편지를 주고 받으며 독일에 대한 꿈을 키우기도 했다. 독일어 공부를 하다 잠이 들면 꿈조차 독일어로 꾸는 적도 많았는데 그때의 감동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독일어로 일기를 썼고 독일어로 생각하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유학을 가는 대신 결혼을 하게 되어 독일에 대한 꿈은 좌절되었지만 결혼 후에도 독문학에 대한 나의 꿈은 식지 않았다. 연년생 두 아들을 두고 어렵사리 대학원 공부를 하며 괴테의 “파우스트”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이며 “파우스트”가 왜 가장 독일적인 작품인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우연히 글을 쓰게 되었고 내 글 곳곳에는 그동안 내가 공부한 독문학적인 자취가 엿보인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독일문학이 내가 글을 쓰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캐나다에서 살던 시절엔 독문학을 전공한 덕에 취업비자를 받는 행운을 얻기도 했다. 그리보면 독일문학은 나와 필연적인 관계였던 것 같다. 그로 인해 내 삶이 훨씬 풍요로울 수 있었으니 말이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