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일상에서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집니다.
한가로운 들녘, 나지막한 바람과 초엽(草葉)의 속삭임과 동행하며.
문득 별리(別離)의 그리움으로 사무치기도 합니다.
함께 한 사람들, 함께 할 사람들 모두.
문득 습작(習作)의 시인이 되기도 합니다.
가슴 한 켠을 물들이는 서정(抒情)을 엮어 내어.
가진 것 없이 풍요로움으로 행복하기도 합니다.
무언가 새롭게 시작하려는 평온한 마음만으로도.
문득 가을의 군상을 화폭에 담아 화가가 되기도 합니다.
소망하고 상상하는 모든 것들을 팔레트에 섞으며.
가을은 그렇게 삶의 자유와 평안과 행복을 선사합니다.
그래서 축복의 계절이라 하기도 합니다.
동양일보는 가을을 맞아 특집기획 ‘이 가을엔…’을 연재합니다.
충북지역 유명 화가의 그림과 함께 문화예술가들이 전하는 기별을 통해 독자 여러분을 가을로 초대합니다.     <편집자>


수숫잎 사각거리는

권 희 돈  시인·문학테라피스트

청운의 꿈을 안고 서울로 가서 공부하던 스무 살 무렵이었다. 나의 가을은 귀향 열차를 타고 달리다 한적한 간이역에서 머문다.

마을과 플랫 홈 사이에는 수수밭이 펼쳐져 있다. 소슬바람에 수숫잎 부딪치는 소리가 사각사각 내 귀에 들려온다. 달빛 아래 비치는 고개 숙인 수수는 마치 친척들이 큰 집에 모여 함께 절을 하는 모습을 닮았다.

실루엣처럼 어른거리던 승객들이 플랫 홈을 빠져나가고, 기차가 떠나고 나면 고향마을은 다시 파편으로 남는다. 측백나무 울타리에 서서 한 여인이 누군가를 기다린다. 옥색 모본단 저고리를 곱게 차려입은 어머니임을 알아차리고 나는 혼잣말을 한다.

‘아, 드디어 고향에 왔구나!’

지금은 마을의 모습이 괴기스럽게 변하였다. 졸졸졸 굽이굽이 흐르던 시냇물은 일직선으로 뻗어 있으나 억센 풀만 무성하고, 기찻길은 녹슨 채로 죽은 지렁이처럼 늘어져 있다. 집집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이는 낯선 얼굴들 뿐.

그러나 내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는 스무 살 적의 사진 한 컷 있어, 나의 가을은 언제나 수숫잎 사각거리고 나의 고향은 언제나 따뜻하다.

집집마다 추석 차례상에 올린 음식장만이 한창이다. 전 부치는 내음이 코끝에 와서 맴돈다.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미각을 되찾은 듯 입에 침이 고인다.






김정희 (충북대 교수·충북예총 기획위원장) 작,‘2013 Thing-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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