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희 수필 '무'

<수상작>
 
역시나 녀석을 찾고자 뒤적인다. 나는 생선 조림을 먹을 때면 으레 녀석을 제일 먼저 찾는다. 날것의 싱싱함을 찾아볼 순 없지만, 그의 남다른 맛을 나의 혀는 여전히 기억한다. 누군가는 씹는 맛도 없는데 무에 그리 좋아 찾느냐고 말할지도 모르리라. 그것은 무의 맛을 진정 모르는 사람의 소리이다.
무란 녀석은 한마디로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언제 어디서든 남의 것을 제 것인 양 전부를 가져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떤 대상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의 맛도 확연히 달라진다.
생선 조림의 무는 생선의 자양분과 바다의 향기를 그대로 끌어안아 짭짤한 맛으로 변신한다. 또 김장 김치의 속에 박은 무는 어떠한가. 결이 삭은 무의 맛은 시원하고 새큼달큼하다. 무를 직접 먹어봐야 알지, 어찌 그 맛을 문자로 형용할 수 있으랴. 어디 그뿐이랴. 겨울날 살얼음이 동동 뜬 동치미 속 납작하게 썬 무는 곰삭은 고추의 맛을 더하여 깨끗하다. 참으로 무는 변신의 귀재이다.
무를 예찬하고자 운을 뗀 것이 아니다. 남의 자양분을 자신의 것인 양 뽐내는 녀석의 이기심을 알리고 싶어서다. 무의 생장기를 살펴봐도 자신밖에 모르는 녀석임을 알 수 있다. 밭의 두둑을 차지하고 자라면서 푸른 얼굴을 세상에 내밀어 자신의 굵기를 자랑한다. 농부는 그 녀석이 잘 자라도록 가으내 거름을 주며 떡잎과 겉잎을 따주며 정성을 다한다. 마침내 햇볕을 가려주던 싱싱한 푸른 잎은 단칼에 제거되고 뿌리인 무가 인간의 손안에 들지 않던가.
어찌 보면 무는 인간 세상에 자식의 모습과 비슷하지 않나 싶다. 나 또한 맏이로 태어나 땅에 닿을세라, 젖은 자리에 누울세라 애지중지 부모님의 품 안에서 고생을 모르고 자랐다. 당신의 육신이 망가져도 아랑곳하지 않으며 자식을 돌보는 것이 부모가 아니던가. 그런 부모님의 모습은 무가 자라던 밭이며, 푸른 잎과 같다. 자식의 걱정은 결혼해서도 끝이 나지를 않는다. 혹여 당신처럼 딸만 낳을까봐 정화수를 떠놓고 비손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지 않던가. 그렇게 부모의 끝없는 관심과 사랑으로 자식은 성장한다.
그러나 자식은 그 과정을 알지 못한다. 아니 모른척하는지도 모른다. 무가 식탁에 올라 인간의 뱃속으로 들어갈 때까지 녀석은 분명히 자아도취 상태였으리라. 남의 자양분을 빼앗아 지금의 자리를 차지했건만, 혼자 잘난 양 우쭐대다 인분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야만 알겠는가. 자식 또한 마찬가지리라. 자신이 누구의 음덕으로 여기까지 왔는지 돌아볼 일이다.
얼마 전 신문에서 부모님을 모시길 꺼린다는 언짢은 기사를 보았다. 부모 봉양하기를 십이 년 새에 54%가 줄었다고 한다. 자식 봉양을 받지 못하는 홀로 사는 노인의 삶은 빈곤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단다. 이 땅에 부모 없이 태어난 자식은 어디에도 없잖은가. 시쳇말로 ‘세상이 거꾸로 돌아간다.’라는 말이 맞는 것이 성싶다. 무가 아무리 잘났어도 ‘무’ 일 뿐이다. 세상이 바뀌었다고 해도, 자식이 아무리 지위와 명성이 높다 해도, 혼자 태어나 장성할 순 없지 않은가.
이에 맞닿아 지인에게 들은 서글픈 이야기가 떠오른다. 명성 높은 분의 어머님이 중병에 걸려 투명 중이란다. 그런데 잘난 아들은 업무가 바빠서 병원에 한 달에 한 번도 얼굴을 내밀지 않는다고 한다. 아들은 두어 달에 한 번 얼굴 보이는 것이 무에 자랑이라고 여기저기 말하여 내 귀에까지 들리게 하는가. 자식을 그리워하며 홀로 투병할 그분의 어머님을 생각하니 이 땅에 자식으로서 고개가 절로 숙여진다.
무가 싫다는 소리가 아니다. 어머니가 없는 틈을 타 부엌에 들어가 간이 짭짤하게 밴 무를 달게 먹었던 기억이 떠올라서다. 시간이 꽤 흘렀건만, 무에 얽힌 나의 유년시절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어머니는 무를 넣은 고등어조림을 만들어 아버지의 밥상에 자주 올렸다. 요리할 때 눈도장만 찍었지 생선에는 감히 젓가락을 델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도 난 그 빚을 갚으려고 무만 찾는지도 모른다.
나를 식물에 비유한다면, 아마도 무와 닮았으리라. 무가 이기적이라고 했지만, 그 이기심이 내 모습과 닮아 있어 싫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음식의 맛을 맛깔나게 돋우는 무처럼 잘나지도 못하다. 그러나 인간이 무와 다른 점인 행위를 선택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현재의 삶은 자신이 매순간 행한 선택의 결과이다. 내가 부모님께 알게 모르게 저지른 행위나, 많은 사람이 부모 봉양을 꺼리는 일 또한 당신의 선택에 달린 것이다.
법정의 “과거도 없다. 미래도 없다. 항상 현재일 뿐이다.”라는 문장은 지금 이 자리, 현재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과거를 지울 순 없다. 그러나 앞으로 똑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으며, 또 다른 과거에 후회를 줄이는 일이다. 그러기에 무에 바치는 나의 애증은 지속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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