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택 시인·충북문인협회장

올 여름, 우리들을 숨 막히게 했던 폭염의 깃발은 서서히 물러날 채비를 하고 그렇게도 당당하던 기세가 한풀 꺾어지고 있다.
달이 밤을 밝히면 하루를 접듯이 요란 했던 한해의 푸르름을 만끽하던 세상의 정원도 정리를 해야 하는 계절 가을이 성큼 왔다.
가을은 푸르던 날을 붉게 물드는 날이다. 붉은 물이 든 담장이 잎사귀가 가랑잎으로 묻어와 아침저녁 낮은 곳으로 내려 쌓이고, 밤이면 들릴 듯 말 듯 낯익은 벌레소리가 그리움과 서러움의 협주곡이 되어 밀려온다.
가을이 되면 무슨 큰 변란이 끝난 것 같이 나뭇잎들마다 세상 곳곳에서 온통 붉은 상처투성이로 을씨년스럽게 바뀐다.
북쪽 가장 높이 있는 것들부터 벌겋게 얻어터지고 낮은 곳이라 하여 마음 놓을 수 없이 가을빛에 못 이긴 잎새들은 시체가 되어 낮은 곳으로 떨어진다. 그렇게도 푸르렀던 젊음의 영혼들이 가을이란 시절이 오면 어김없이 아픈 울음들을 토해내며 붉은 벌거숭이가 되기도 한다.
이렇게 한해를 털기 위한 가을은 해와 달이 뜨지 않을 때까지 변하지 않고 윤회할 것이다. 지상에 내려앉은 잎들은 매년 홀로된 나뭇가지들의 추운 겨울을 녹여주는 따뜻한 이불이 되기도 하고, 자신의 몸을 썩혀 다음해 봄날 거름으로 양식이 되어 보은을 잊지 않는다.
가을은 지우기만 하는 쓸쓸한 계절이 아니라 삼라만상 모두가 뿌린 씨앗의 열매를 거두어들이고 은혜를 보답하는 수확의 계절이기도 하다.



황효원(한국화가·충북미술협회 사무국장) 작, ‘붉은 숲에  내리는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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