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훈(충북생생연구소장)

민족의 가장 큰 명절이 다가오고 있다. 올 해 추석이 좀 빠른데다 명절 앞두고 계절에 안 어울리게 비가 내리고 싸움하지 말고 민생을 챙겨달라는 국민들의 여망을 무시한 채 허구한 날 정쟁을 일삼는 정치권 때문인지 왠지 마음이 어수선하다. 계절이나 날씨야 어쩔 도리가 없으니 정치권만이라도 국민들이 푸근하고 넉넉한 한가위를 즐길 마음이 나도록 해 주었으면 좋겠다.  

 

요즘은 차가 많아져 덜하지만 전에는 어김없이 귀성행렬 때문에 차표를 구하는 것이 어려웠다. 오래 전 대학 다닐 때 명절에 고향에 내려갔다가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겨 서울로 돌아가야 하는 데 표를 구할 수 없었다. 표를 못 구한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무리 예비차를 배차해도 그 날 올라가기는 불가능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무작정 고속버스 사무실로 가서 책임자로 보이는 분에게 급한 사정을 말했더니 그 분이 딱하게 봤는지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길게 늘어선 줄을 지나가는데 다른 승객들로부터 새치기 하지 말라며 험한 말이 오고 가 겁이 벌컥 났는데 그분이 ‘이 학생은 본사 임원 아들인데 나도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요’라고 하니 신기하게도 그렇게 소리치던 분들이 잠잠해 져 무난히 차를 타고 왔었다. 그 때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말이 갖는 의미가 잘 실감나지 않았었는데 그 이후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우리 사회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말에 관대한 것 같다. 법이나 규정을 어겨도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말로 정당화하고 또 어느 정도 용인이 되는 사회다. 도심의 거리를 걷다보면 복잡한 길 한복판에서 행상을 하는 분들을 자주 접할 수 있다. 규정상으로는 안 되지만 생계형이라는 이유로 묵인되고 있다. 어쩌다 단속을 하게 되면 법에도 인정이 있어야지 먹고 살길 없는 서민에게 그래서는 안된다며 항의를 하는데 그런 것이 또 일반 국민들에게 먹혀 들어가 단속하는 공무원들만 인정머리 없는 사람들이 되는 사회다. 운전을 하다보면 신호를 무시하고 가는 차가 많다. 승용차는 좀 조심스러운 반면 영업용차들은 좀 더 과감하다. 길이 막히는데 신호 다 지키면 먹고 살기 어려워 그럴 수밖에 없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사회에 정이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인정사정없이 법대로만 운영되는 사회는 숨이 막혀 살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 때문에 공동체의 기반이 약해진다면 그것은 피해야 한다.

 

미국을 포함한 어느 선진국에도 서민들이 있다. 그들도 먹고사는 문제는 우리나 다를 바 없다. 어떤 경우는 선진국이지만 우리 사회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 사는 사람들도 많다. 주미 한국 대사관에 근무할 때 미국의 수도인 와싱턴 DC에도 거지가 많았다. 우리 같으면 적선을 할만도 한데 그들은 대부분 그냥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우선 일할 수 있는데 안하는 게으른 사람들을 도와 줄 필요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고 또 세금을 냈으니 정부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라는 생각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들 사회에도 영업용 차량이 있고 행상이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 먹고 살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규정을 어기는 것을 당연시 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나 둘 질서를 어기면 사회 전체의 공동체에게 피해가 되고 궁극적으로 다른 형태로 자신들에게 손해가 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아파트 층간 소음 문제가 점차 사회문제화 되어 가고 그에 관한 규정들이 만들어져 가고 있다. 아래 웃집에 사는 처지에 어느 정도 이해하고 살면 될 수도 있는 일을 규정까지 만들게 되는 것은 주로 소음을 만드는 쪽에서 아래 층 이웃에 대한 배려가 적다보니 서로 얼굴을 붉히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생기게 된 때문이다.

 

인정과 남에 대한 배려가 넘치고 개인과 공동체 전체의 이익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는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우리 모두가 참여했으면 한다.
 

동양일보TV

저작권자 © 동양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