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희 팔

텔레비전의 한 연예프로그램 시간이다. 패널들의 열띤 공방이 될 오늘의 주제는 ‘추석명절’이다.
여자 쪽 한 패널이 남자 MC에게, ‘명절이 무슨 날이냐’ 고 묻는다. 질문에 날이 서 있는 것으로 보아 몰라 묻는 게 아닌 것 같다.
MC가 대답한다.
“사전적인 뜻이지만 제가 알기로는 ‘지난날로부터 내려오면서 해마다 일정하게 지켜 즐기는 날’ 아닙니까?”
그러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그러니까 한마디로 ‘명절은 모두가 즐기는 날’이지요.” 하더니 옆의 다른 패널들과 앞 쪽의 방청객들을 향해, “그렇다면 우리 주부 여러분, 과연 우리에게 ‘명절은 즐기는 날’입니까?” 하며 동조를 유도한다.
아니나 다를까 ‘아니요!’ 하는 함성이 터진다.
방청석엔 주부들로만 꽉 차 있다. 뒤이어 예서제서 다른 여자 패널들이 다투어 나선다.
“모두가 즐기는 날이라니, 우리 주부들에겐 무덤이야 무덤! 이번 추석에도 우리들은 죽어날 거야. 선배언니 안 그래요?”
“그렇구말구지 그래도 요즘 주부들은 화수분이야 모든 걸 사서 할 수 있으니까. 우린 시부모 모시고 집안 살림하랴 연기생활 하랴 게다가 명절 때는 명절특집으로 날밤을 홀딱 새우고 들어와서 명절음식을 직접 준비하다 보면 한 일주일 열흘 동안은 파김치야 파김치.”
“그래, 그래, 그래서 ‘명절중후군’ 이란 말이 벌써 우리 때 생겨났다구. 지금 젊은이들은 그래도 그런 건 없지?”
“아이구, 선배님들 그런 소리 하지 마셔요. 오죽하면 지금은 ‘시월드’ 란 말이 나왔을까요. ‘시’란 말만 들어도 어질어질해진다는 판에 명절까지 겹치면 스트레스가 치솟아 소화불량에다 정신이상까지 생겨난다는 말 모르셔요?”
 “여하튼 우리나라 명절 때는 남자로 태어나야 돼. 빈둥빈둥 텔레비전이나 껴안구 먹을 거나 재촉하는 팔자들.”
여자들의 불만이 더 계속하려 하자 이번엔 여자 MC가 나선다.
“남자들은 아무 말이 없군요. 지금 여자 쪽의 얘기에 다 공감하시나 보지요?”
“물론 공감합니다. 그렇지만 남자들도 고생합니다. 명절을 맞아 고향에 내려가려면 누가 운전합니까. 고향길이 가깝기나 합니까. 거길 한 번에 데이트하듯 쫙 달립니까. 가다서다, 가다서다 여섯 시간, 열 시간 넘게 도로에 갇힙니다. 졸립지요, 짜증나지요, 행여 명절 당일에 못 대 갈까봐 조바심나지요. 그런데도 옆의 마누라는 코만 드렁드렁 골고 있습니다. 아마 거의 다 그럴 겁니다.”
“집에 도착해서는 어떻구요. 전같이 우리 남자식구들이 따로 모여서 밤새도록 고스돕을 합니까. 명절특집 텔레비전을 봅니까. 여자들 눈치 피하느라 송편 빚지요 밤 까지요 아버지 대신 축문 쓰지요 제기 챙겨야지요….” “또 있습니다. 여자들 ‘시월드’ 얘기했지요 ‘처월드’도 있습니다. 명절차례 마치면 부모님 눈치 살피며 처갓집에 갈 궁리해야 됩니다.”
여기서 홍 노인은 텔레비전을 꺼버린다. 그리고 옆의 마나님을 쳐다본다.
“내자, 내자도 시집와서 어른들 모시면서 명절에 고생스러워 불만이 많았소. 그런 눈치 안 보이던데?”
“그런 적 없었어요. 명절은 언제나 즐거운 날이었으니깐. 우리 형제들에게 새 옷을 해 입히고 몇 날 며칠 걸리는 명절 음식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는 정황에서도 친정엄마는 늘 즐거운 표정이었다우. 그런 엄마 밑에서 나도 명절이 즐거웠구. 시집와서 시부모 모시고 애들 키우면서 나도 친정엄마처럼 즐겁게 명절을 맞았어요. 엄마는 나한테 그랬어요. 우리 어른들도 이러셨다구. 그래야 복을 받는다구. 그게 내 마음에도 몸에도 저절로 뱄나보지요?”
 “그런데 요즘 젊은 여자들은 그렇지 않는 것 같잖여. 지금 저 텔레비 여자들처럼”
“그간 세상이 많이 변했잖우. 우리 때같이 어디 부모형제들이 한 집에서 살 부딪고 사나요. 다들 뿔뿔이 흩어져 나가 살면서 왕래가 뜸하니 저절로 남남처럼 여겨지게 된 거쥬. 그러니 명절이라구 무슨 정이 있구 즐거운 마음이겠수.”
“그려, 그런 것 보면 그래두 우리 며느리는 무던해. 내색 없이 명절 때마다 와서 고생하는 거 보면.”
대처에 나가 사는 아들내외가 애들 데리고 자주 노부모 찾아들고, 시부모생신 잊지 않고 챙기고, 특히 명절 때는 미리 와서 힘든 일 티내지 않고 묵묵히 치르고 가는 며느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시방 시상에 그런 며느리도 드물지요. 하지만 재밌고 즐거워서 그러겠수. 며느리 된 입장에서 시집에 대한 도리루 어쩔 수 없으니께 그러겠쥬. 보시우, 그렇게 열심히 묵묵히 일은 하면서두 어디 얼굴은 즐거운 표정입디까?”
“그래, 임자말이 맞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이번 추석엔 우리 며느리 즐겁게 해 줄까?”
 “예에, 뚱딴지 같이 그게 무슨 소리유. 설마하니 며느리 대신 나보구 추석음식 준비 다 하라는 건 아니겄쥬?”
“그게 무슨 말여 그건 아니구, 어때, 추석차례 마치구 며느리 친정에 보냅시다.”
“예?” 마나님이 영감의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왜, 싫여?”
“아니, 너무 놀라워서 그래요. 영감,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했수. 인제 우리 영감 신식영감 다 됐네. 그럽시다. 나두 찬성이우.”
자식식구들이 추석 전날 들이닥쳤다.
며느린 하던 대로 오자마자 옷을 갈아입고 부엌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아들애는 전에 없이 송편도 빚고, 밤도 깎고, 제기도 찾아와 씻고 닦고 부산스럽다.
손자 두 놈들도 거든다. 지난 명절까지만 해도 안방에서 부자지간 모여 앉아 텔레비전에 목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기특한 일이다.
마침내 추석날이다. 온 식구가 즐겁고 엄숙한 마음으로 차례를 끝냈다. 그리고 급기야 인제 홍 노인이 며느리에게 중대발표를 할 차례다.
그런데 며느리가 아들애의 허리를 가볍게  툭툭 치며 살짝살짝 꼬집는다. 무엇을 재촉하는 신호 같았다.
이때 “모두들 여길 보거라. 오늘 중대발표를 하신단다.” 마나님이다.
“예?” 아들식구들이 의아해 한다.
“그래, 아주 중대한 발표다. 특히 에미 들어라! 오늘 여기 시집일은 다 끝났으니 인제 친정으로 가서 아버님 어머님을 뵙도록 해라. 임자, 송편이랑 음식을 넉넉히 싸 주구려.”
그러자 큰 손주 놈이 쑥 나선다.
“할아버지, 어떻게 엄마 맘 아셨어요. 엄마가요 아빠한테 오늘 외갓집에 가보고 싶다고 할아버지께 말씀 좀 드려보라고 했거든요.”
“어허, 그랬어. 니들두 좋으냐. 오늘은 다들 즐기는 날이니까 얼른 외갓집에 가서 즐겁게 놀다 와!”
 이때 문이 활짝 열린다.
“엄마, 아부지, 우리 왔어요.” 딸네들이다.
“시댁어른들이 올 추석부턴 친정에 다녀 오라셨어요. 반갑지 엄마 아부지?”
“그럼, 그럼!” 이러는 걸 보자 며느리가 시무룩해 한다.
이걸 홍 노인이 눈칠 챘다.
“얘, 얘, 얘, 니들두 빨리 가거라. 여기 뒤치다꺼리는 여기 사람이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구.”
“그래두 고모가 오랜만에 왔는데….”
“오라, 언니두 친정에 가려던 참이었수. 얼른 가셔, 얼른 가셔!”
그러면서 한사코 등을 떠민다. 그제서야 며느리 얼굴에 화색이 돈다.                              ♠              

약 력

△1941년 충남 논산 출생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국민대 교육대학원 졸
△28년간 중등교사 재직
△한국문인협회·한국소설가협회 회원, 충북소설가협회장, 동양일보 논설위원
△저서 콩트집 ‘시간 관계상 생략’, 단편소설집 ‘바람 타고 가는 노래’ ‘향촌삽화’, 장편소설 ‘동천이’, 전기집 ‘고장을 빛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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