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수필가)

  밤10시, 시내버스 승강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늦은 시각에 나올 일이 없었는데 부득이한 사정이었다. 승강장에는 나 혼자였기에 겁도 나서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서 있었는데 좀 있으니 10여명은 족히 되는 한패의 남학생들이 묵직해 보이는 가방을 메고 몰려왔다. 학원에서 쏟아져 나오는 고등학생 쯤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다.

  이 시각까지 공부에 시달렸을 그 아이들은 평소와 다르게 아주 조용했다. 지친 듯 풀죽은 발걸음으로 하나 둘 버스를 타고 흩어져 갔다. 안됐다는 생각이 났고, 우리 손주들 얼굴이 떠오른다. 저 아이들도 어느 집의 귀하디귀한 아들들이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자식들인 것이다.

  새벽밥을 먹고 학교로 갔을 테고 하루 종일 공부한 것도 시원치 않아 학교가 파하고는 학원에서 또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처지인 것이다. 사는 것이 생존경쟁이라고 하지만 꼭 이렇게 사는 길 밖에 없는 것일까.

  저 아이들이 파란하늘을 이고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를 보았을까? 과수원에 빨갛게 익어서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사과의 고운 빛깔을 보았을까? 이 가을 산비탈에서 하얗게 나부끼는 갈대들의 유연한 춤사위 같은 건 본 일이 있을까? 아니지. 그런 걸 볼 새도 없거나와 볼 마음의 여유도 없을 것이다.

  집에서 늦은 시각까지 기다리는 부모의 마음은 또 어떤가. 아이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아 팽팽한 긴장감으로 기다리다가 들어오고 나서야 휴 하고 안도의 숨을 쉴 부모들의 마음도 무겁기는 마찬가지 일터. 이런 모습이 우리나라에만 있는 진풍경이라니…

  저 아이들의 가슴 속에는 남에게 뒤져서는 안 된다는 초조감과 장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꽉 차 있을 테니 누구를 배려하고 사람을 사랑할 여유 같은 것, 자연의 신비를 느끼고 동화되는 정서 같은 것이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없지 않은가. 부모와 함께 식사 할 기회는 좀처럼 주어지지 않으니 대화해 볼 기회도 없다. 폭발 직전의 우리 아이들 참 불쌍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어른들은 요즘아이들의 인성교육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정직하지도 않고, 남을 배려하지도 않으며, 책임감도 없고, 자기 조절 능력이 없다고 탓한다. 중앙일보가 16개 도시 중학생 2171명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한 결과 중학생들의 인성이 낙제점수다.

  정직을 예로 들면 만 원짜리 한 장을 내 보이며 잃어버린 사람 손들어 보라는 말에 학급 아이들의 반수가 손을 들었다는 것이다. 만 원짜리는 한 장인데 말이다.

  “친구요? 엄마가 다 필요 없대요. 공부만 잘하면 된다고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차피 저희를 판단하는 건 성적이니까요.” 중학교 1학년 여학생의 말이다.

  “왕따 당하지 않으려면 왕따 시켜야 해요. 내가 살려면 마음 내키지 않아도 다른 애를 괴롭혀야 돼요.”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의 말이다. 섬뜩한 생각마저 든다. 이런 아이들이 남을 배려하기는커녕 도덕심은 간데없고 이기주의가 될 것이며 늘 불필요한 경쟁심에 시달릴 것이다.

    “요즘 학생들은 모두 화가 난 상태다. 일상생활에서 화를 내지 않는 학생은 왕따를 당하고 한 문장에 욕이 서너 개는 들어가야 정상인 것처럼 생각 한다” 어느 교사의 말이다. 욕을 뜻도 모르고 일상어로 쓸 만큼 말씨는 거칠고 상스럽다는 것을 평소에 접하게 될 때마다 민망하고 한심한 것이 사실이다.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모범을 보였는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남을 밟고 이겨야 성공한다는 그릇된 가치관,  불법과 비리, 거짓말을 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조차 느끼지 않는 도덕 불감증이야말로 사회 지도층이 보여 온 추한 행태인 것이다.  어른들의 잘못된 가치관과 행동이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이된 결과가 이렇게 낮은 인성 수준으로 나타났을 것이다. 아이들은 SNS를 통해 볼 것 못 볼 것 다 훤하게 들여다보고 있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는가.

  학교도 주입식 수업을 지양하고 토론과 스포츠 활동, 야영 등 체험활동으로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사회성을 익히고, 자기가 하고 싶은 공부를 마음 놓고 할 수 있게 하여 인성교육 실천의 장이 되어야 한다.

  강남 부자들의 고액과외를 따라가지 못하는 부모는 늘 주눅이 들어 살고 있다. 그래서 학부모들은 이 땅을 떠나 외국에서 마음 편하게, 자유롭게 아이들을 가르치고 싶어 안달이다.

  더 늦기 전에 입시교육의 지옥에서 아이들을 구해 내야한다. 그리고 인성교육으로 뱃머리를 돌려야 학생도 살고 학부모도 살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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