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췄다.

아니다. 시간이 멎은 듯하던 정적인 공간이 조금씩 움직인다. 시간이 움직인다. 시간이 흐른다. 그리고 견고해 보이던 형체는 풍화작용을 거친듯 안으로부터 서서히 부서지고 무너져 내린다. 부서진 것들은 이내 가루가 되고 흙이 되며 마침내 한줌의 먼지로 변한다. 소멸이다. 사라짐이다.

2013 청주공예비엔날레 기획 전시관.

루빈의 ‘위대한 다라니경’ 시리즈 작품 앞에서 나는 발을 떼지 못하고 서 있다. 왠지 마지막 형체가 사라지는 아픔의 현장을 함께 지켜주고 있어야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품 앞에 설치한 영상을 통해 그의 작품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형체가 사라지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리고 눈물이 난다. 왜 눈물이 날까. 세월의 흐름이 부질없게 느껴져서일까.

비엔날레 개관 첫날 루빈의 도예작품들은 가마에서 갓 구워져 나온 모습 그대로 당당하게 이 자리에 놓였었다. 다른 작품들과 특별히 다를 것 없이 완전하게 생성된 모습으로 공간을 차지했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시간이 지날수록 시나브로 부서지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형체를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허물어졌다.

가루처럼 변해서 주저앉은 현재의 작품에서 원형을 떠올리며, 문득 이런 작품을 선보인 루빈이라는 작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그는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일까. 그는 왜 다른 작가들처럼 완성된 아름다움과 조형미로 감동을 주려 하지 않고 애써 만든 작품이 관객들 눈앞에서 소멸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그리고 관객들은 과연 그의 생각을 공유할 수 있을까.

소멸은 사라져 없어짐을 말한다.

루빈 작품의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지켜 본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이 ‘현대인들에게 소유와 욕망의 덧없음을 환기시켜주는 작품’이라고 말한다.

어느 행정가는 ‘중국의 사회적 변화와 이율배반적인 개인의 삶에 대한 허무’를 표출한 것이라고 말하고, 어느 미술인은 ‘동양의 여백의 미를 화선지가 아닌 조형물로 구현한 작품’이라고 말한다.

그에게 확인하지 않았으니 누구의 평이 그의 생각과 일치하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언젠간 사라진다는 진리처럼, 현재에만 매달려 살고 있는 인간에게 눈에 보이는 모든 물체와 현상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깨우쳐 주려한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화려한 탑이거나, 값지게 보이는 우아한 도자기, 그리고 마음에 지침을 주는 다라니경조차도 결국은 모두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이니까.

나는 전시회를 갈 때 일부러 오디오 설명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설명이 오히려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해 상상력을 제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빈의 ‘위대한 다라니경 시리즈’ 앞에서 나는 잊고 있던 과거의 익숙한 것들의 사라짐을 떠올리며 가슴이 아팠다.

동네방네 천방지축 뛰어다니느라 하루가 짧았던 어린 시절, 흐릿한 백열전구 아래 밤새워 책을 읽던 학창 시절,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뜨거웠던 젊은 날의 사랑, 그리고 우정을 나누던 그 많던 친구들… 지금도 아련히 기억의 창고 속에 남아 있는 그것들은 모두 사라진 것일까. 외양을 지키지 못하고 가루가 되어버린 루빈의 도자기처럼 모두 소멸되어진 것일까.

생각들은 나의 감성을 흔들었다.

그런데 추억들을 떠올리자 갑자기 가슴이 따뜻해졌다. 아니다. 아니다. 사라진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아도 가슴에 있고 그리움이 남아있듯이 잊은 것이 아니다. 소멸된 것이 아니다. 자연의 순리는 반복되는 것. 소멸은 생성을 예고한다.

아마 루빈의 작품도 그럴 것이다. 부서지고, 주저앉고 흙이 되는 것은 원래로 환원되는 것이요, 새로운 탄생의 예비일 것이다.

나는 이제는 형체가 사라지고 아카이브로 흔적과 이미지로만 남게 될 루빈의 작품에 미소를 보내며 다음 전시실로 발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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