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수필가

  ‘샘, 오늘 댁에 계신가요? 2시 쯤 찾아뵈려고 하는데 어떠세요?’

내게 볼일이 있어 우리 집을 찾아오겠다는 한 지인의 문자 메시지다. 언제부터 내가 ‘샘’이 된 것일까? ‘선생님’을 줄여서 한 말이라는 것을 모르지는 않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다.

  워낙 바쁜 세상이니 뭐든지 줄여서 짧게 빨리 전달하겠다는 의도겠지만 요즈음 젊은이들이 쓰는 줄임말이나 비속어, 은어를 나이 든 사람들은 알아들을 수가 없을 지경이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 이라는 드라마는 ‘넝쿨당’ ‘해를 품은 달’을 ‘해품달’로 부르는 것이 한 예이다. ‘그리고’ 는 ‘글구’ 로 ‘갈비’는 ‘갈수록 비호감’이라는 뜻이란다. ‘얼빵’ ‘훈남’ ‘안습’ ‘귀차니즘’ ‘열공’ ‘깜놀’ ‘멘붕’ 같은 말들은 비속어 사전이라도 있어야 알아들을 지경이다. 왜 우리의 한글이 이렇게 오염되고 있는 것일까.

  아파트 이름만 해도 온통 외래어가 판을 친다. 쉐르빌, 레미안, 비발디, 더샾, 메르디앙, 휴면시아… 뜻도 모르면서 무심코 부르며 살고 있다. 오죽하면 유머 중에 아파트 이름이 어려운 것은 시어머니 못 찾아오게 하려고 그렇게 짓는 다는 웃지 못 할 얘기도 있다.

  상가의 간판들도 반 이상이 영어나 외래어다. 아름다운 우리말을 두고 외래어로 짓는 것은 어딘지 더 멋있고 근사해 보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오히려 우리 고유어로 지은 간판이 더 정겨워 보이고 돋보이는 것이다.

  언어는 그 나라 문화의 척도이며 문화의 매개체라고 할 수 있다. 컴퓨터와 핸드폰이 발달하면서 문자가 언어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시대에 맞지 않거나 뒤쳐지는 문자는 앞으로 문자혁명을 통해 문자를 바꾸는 시대가 올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 한글이야말로 디지털 시대에 맞는 글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은 모음이 열자, 자음이 열넉 자이다. 그리고 받침이 있다. 모음과 자음을 조합하면 하나의 글자가 되고 여기에 받침을 더해 사용할 수 있으니 한글은 그 구성원리가 과학적이고 독창적이며 체계적이면서도 간단하기 때문에 배우기가 매우 쉽다. 한글은 글자 그대로 읽을 뿐 아니라, 인쇄체나 필기체가 따로 없다. 이에 비해 영어는 인쇄체와 필기체가 서로 다르며, 글자대로 읽지 않는 경우도 많다보니 배우기 어렵다. 한글의 이러한 특징은 우리나라를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되는 데 큰 기여를 한 셈이다.

  한글은 세계 그 어느 문자보다도 풍부한 표현력을 지녔다. 현재 한글은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발음을 표기할 수는 없지만, 현존하는 문자 중에서는 가장 많은 발음을 표기할 수 있다고 한다. 소리를 표현하는데 있어 일본어는 300개, 중국어는 400여개의 표현만이 가능한 것에 비해 우리말은 8800개를 낼 수 있다고 한다. 우리말의 표현력이 풍부하다보니 한글을 외국어로 번역하기가 힘들다고 불평할 만큼 우리말의 표현이 다양한 것이다.

  언어학 연구의 권위를 자랑하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언어학 대학이 1990년대 중반에 합리성과 과학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하여 세계 30개 문자에 대한 순위를 매겼는데, 1위를 차지한 문자가 바로 우리 한글이다. 한글이 세계 모든 문자 중 가장 훌륭한 문자라는 사실이 공인된 것이다.

  이런 훈민정음의 우수성을 인정하여, 1997년 유네스코에서 "세계 기록 유산" 으로 등록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이미 유네스코는 1989년에 ‘세종대왕상’을 만들어 인류의 문맹률을 낮추는 데 공헌한 단체나 개인을 선정하여 상을 주고 있다. 이처럼 세계가 인정하는 우리글의 우수성을 정작 우리 자신이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라 말씀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하므로, 일반 백성이 말하고자 하나     제 뜻을 능히 펴지 못할 자가 많은 지라,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28자를 만드나니 사    람마다 쉽게 학습하여 사용하는 데 편케 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것은 세종대왕이 직접 서술한 훈민정음 서문의 첫머리이다. 세종대왕은 문화는 전체 백성의 것이 되어야지 일부 지배 계급이나 특권층만의 향유물일 수 없다는 것이다. 백성들을 위하여 집현전 학자들과 고심하며 한글을 만드신 세종대왕의 간절한 염원을 생각해보면 한 글자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우리글인 것이다.

  10대 청소년들이 뜻도 모르고 쓰는 저속한 언어 습관을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들의 정신까지도 피폐해지고 말 것이다. 심하게 오염되고 홀대 받고 있는 우리말 파괴를 시급히 바로잡지 않는다면 자랑스러운 우리의 문화유산이 설 자리를 잃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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