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준(청양군 목면 부면장)

대원군은 꿈이 있었다. 지긋지긋한 세도정치를 종식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왕국의 꿈이었다. 그래서 며느리를 한미한 집안의 여식으로 골랐다. 여흥 민씨 집안 민치록의 딸 자영이었다. 어린 자영은 총명했다.

12세에 즉위한 고종이 15세 때 한 살 위인 민자영과 혼인하니 그녀가 민비다. 고종은 어린 나이에도 이미 혼인 전에 정을 나누던 이상궁이 있었다. 이상궁은 회임까지 하여 고종의 품에 완화군 이선을 안겨준다.

시아버지 대원군이 완화군을 세자로 봉할 움직임을 보이자 민비는 극심한 불안 속에 결단을 내린다. 최익현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고 전횡을 일삼는 대원군을 비난한 것이다. 결국 민비는 시아버지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데 성공한다.

민비가 등장했다. 대원군이 그동안 강력한 쇄국정책을 폈으니 민비는 쇄국을 지양하지 않으면 안 될 입장이다. 민비가 개국으로 기울었다고 해서 그녀가 개화파인 것은 아니다. 민비와 민씨일족이야 말로 조선의 변화를 위해서 개화파들이 타도하려 한 공공의 적들이었으니까.

개화의 바람을 타고 등장한 신식군대 80명은 별기군이라 하여 특별대우를 받았다. 일본식군복을 입고 장안을 누비면 사람들이 부러워했다. 특별대우를 받는 별기군을 구식군인들은 좋아할 리가 없다. 결국 구식군인들의 증오가 폭발하는 일이 발생했다. 13개월째 봉급을 받지 못한 그들에게 모래와 겨가 많이 섞여있는 쌀이 급료로 지급된 것이다.

1882년의 임오군란이다. 선혜청 민겸호 집에 몰려간 군인들은 난군이 되어 민겸호 집에 불을 지른다. 그들은 잡혀간 동료들을 빼내고 민씨 척족을 찾아 장안을 휘젓기 시작한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게 번진다.

때마침 대원군의 밀약을 얻어낸 난군은 일본 공사관을 습격한다. 난군은 일본인 군관 13명이 죽이고 민씨 척족을 찾아내 살해하고 급기야 민비를 제거하기 위해 대궐로 진입한다. 민비가 충청도로 몸을 피한 후였다.

과격한 난군의 행동은 당시 민심의 표상이었다. 민비는 왕인 고종을 제쳐두고 국정을 농단했으며 자신의 척족은 능력여하를 가리지 않고 중용했다. 뇌물을 좋아하여 백성을 착취하였고 미신에 빠진 나머지 아들을 위해 무당과 굿에 나랏돈을 물 쓰듯 사용하여 국고를 더욱 피폐하게 만들었다. 미혹한 믿음은 왕비의 총명함조차 가려 버렸다.

대원군의 등장으로 복귀할 기회가 없어질 것을 염려하던 민비는 민영익을 시켜 청국 사령관 오장경에게 밀서를 전달하도록 했다. 대원군의 제거를 부탁하는 편지였다. 이 땅에 터를 잡은 청나라는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에도 정세를 안정시킨다는 핑계로 계속 군대를 주둔시켰다.

주둔군의 사대당으로 가득한 조정에도 미래를 걱정하는 신진세력들이 있었다. 이들은 김옥균, 박영효 등 개화파들이었다. 개화파들은 발전된 일본을 보고나서 하루빨리 조선을 변화시키고 싶어서 조급해졌다.

당시 일본은 제물포조약에 따라 공사관을 경호할 백 이십 명의 일본군을 주둔시키고 있었다. 다케소에와 개화당은 일본군과 스무 살의 서재필이 이끄는 보잘 것 없는 조선군대 사십 명을 믿고 정변을 감행한다.

1884년 갑신정변이다. 개화당은 청국황제에 대한 조공허례를 폐지하고 문벌폐지와 인재등용, 인민의 평등권인정, 지조법 개혁 등 근대국가의 기초가 되는 개혁들을 실시하려 했다. 조선에 꼭 필요한 개혁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왕실과 민심이 따라주지 않는 나홀로 개혁이었다. 전제 왕조와 기득권세력을 타도하자는 혁명에 대상자인 고종과 민비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것이 그들의 한계였다. 개혁은 3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1894년 봄 동학의 고부접주 전봉준을 필두로 더 이상 탐학에 견딜 수 없는 민초들이 일어섰다. 들불이었다. 들불은 삽시간에 온 나라에 번졌다. 5월에 진주성이 함락되자 민비는 청국에 구원요청을 했다. 청병이 파견되자 텐진조약이 자동 발효되어 일군도 함께 들어왔다. 굶주린 하이에나들은 썩은 고깃덩이를 사이에 두고 진흙탕 싸움을 시작했다.

스스로 자라나는 개혁의 싹들을 잔인하게 잘라버리더니 무리한 외세의존이 결국 부메랑이 되었다. 개화에서 사대로, 친일에서 친청, 친러로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권력유지를 위해 논리도 정강도 일관성도 없었던 민비는 1895년에 자신의 침전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무능한 지아비를 둔 여인의 비극이었을까.

민비와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두고 의견이 분분하다. 그녀의 비극적 죽음은 사실을 미화시키는 유리한 조건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미화된 드라마가 역사까지 바꿀 수는 없다. 호칭 논쟁은 본질을 벗어난 논쟁이다. 그럴 여유가 있다면 좀 더 객관적인 시선으로 그녀의 삶에 다가가 우리가 깨달아야 할 역사교훈을 발견하는데 더 힘써야 한다. 그게 핵심이다.

나라가 어떻게 그 지경이 됐는지에 대한 고찰이 먼저여야 한다. 그걸 아프게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빛나는 역사를 되새기는 것 못지않게 수치스런 삶도 드러내어야 한다. 전후 사정도 제대로 살피지 않고 과오를 감싸주는 일에 급급한 것은 전혀 지혜롭지 않다. 후세에 잘못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민비와 명성황후... 장미는 어떤 이름으로 불리어도 향기를 잃지 않는다. 꽃이 향기롭지 않은 것은 이름 탓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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