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선(본사 상임이사)

가을이 되면서 하루가 다르게 풍경이 변한다.

그토록 짙던 녹음은 다 어디로 갔는가.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노래했던 미당의 시 구절이 생각나는 계절이다. 출근길에 보았던 나뭇잎 색깔이 다르고, 퇴근길에 보는 나뭇잎 색깔이 다르다. 순한 햇살 부드러운 바람, 마치 한 폭의 파스텔화 같은 가을풍경을 보며 이처럼 사계절이 있는 나라에서 사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감사함을 느낀다.

주말이면 토막 짬을 내서 생태산행을 따라다닌지 근 일년이 다 되어 간다.

먼 곳은 가지 못하고, 우암산 상당산성 것대산 선도산 내암리 좌구산 등 도시 인근의 편안한 산과 들을 주로 돌아보았을 뿐이지만, 그 안에서 살고 있는 다양한 나무와 풀 벌레들을 많이도 만나보았다.

개인적으로는 소득이 컸다. 남들처럼 몸에 좋다는 산야초나 버섯 열매 등의 채취에는 관심이 없어서 물질적인 소득은 없었지만, 60평생 모르고 살던 소소한 식물들의 이름이나 생김새를 조금씩 알게 된 것이 큰 소득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차를 타고 지나가면서도 나무의 수형을 보고 무슨 나무인지 알아보는 버릇도 생겼다.

그 뿐만이 아니다. 모두 도토리로만 부르던 참나무 열매들이 실은 각기 다른 나무의 열매들이라는 것, 상수리와 신갈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의 잎과 열매를 구분할 수 있게 됐고, 들국화로만 알았던 가을 국화 종류를 구별해 보는 눈도 조금은 트였다.

그 중에도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확실하게 구분하게 된 것은 가을나들이의 제일 큰 기쁨이다. 꽃색깔과 화형이 비슷해 헷갈리던 쑥부쟁이 꽃과 벌개미취 꽃도 구분하고, 미국쑥부쟁이, 개쑥부쟁이, 까실쑥부쟁이도 각기 다른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구절초와 산국의 향은 또 얼마나 매혹적인지...가던 걸음을 멈추고 향을 맡으며 꽃 주위를 맴도는 등에를 관찰할 정도로 여유도 생겼다.

그런데 가을 산행이 마냥 행복한 것은 아니다. 겉으로 평온한 것처럼 보이는 그들이 지금 얼마나 치열하게 겨울을 준비하고 있는지 들여다보면 마음이 아프다. 모든 풀들이, 모든 나무들이 씨앗을 맺고 열매를 맺어 내년을 예비한다. 이미 겨울눈들도 만들고 있다.

가장 마음이 아픈 것은 뿌리잎들이다. 나무들은 나뭇잎과 결별하고 털로 둘러 싼 겨울눈으로 겨울을 버티면 되지만, 뿌리잎들은 찬 땅바닥에서 맨몸으로 겨울을 나야 한다. 모두 황홀한 단풍에 취하고 매혹적인 열매에 빠져 가을을 예찬할 때 뿌리잎들은 낮고 낮은 땅에 엎드려서 겨울날 준비를 하고자 매무새를 고치고 있다.

민들레, 씀바귀, 냉이, 뽀리뱅이, 점나도나물.....산기슭이나 밭가장자리 그리고 도로가에 자리잡은 이들은 햇볕이 짧아지면서 점점 더 낮게 몸을 땅에 붙이고 있다. 치마폭을 펼치듯 동그랗게 잎을 펴서 더 넓은 공간을 확보하려는 모습은 바라만 보고 있어도 눈물겹다. 방석식물이라고도 하고 로제트형 식물이라고도 하는 이들에게 누가 뿌리잎이라는 아픈 이름을 붙였을까. 실제 제 뿌리가 없는 것도 아닌데, 분명히 땅속에 뿌리를 깊게 박고 있음에도, 한겨울 지상에 남아서 추위와 싸우며 뿌리 노릇을 하는 잎이라니. 참 자연의 신도 야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모습을 관찰하지 못했던 예전에는 이른 봄에 이들을 발견하면 ‘벌써 냉이가 나왔구나. 민들레가 일찍 나왔네’라며 그들이 그 모진 겨울을 이겨내고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보인다. 2년살이 초본으로서 내년 봄에 피울 꽃을 위해 뿌리잎으로 월동할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내년 봄, 다른 키 큰 식물들이 싹을 틔워 그늘을 만들기 전에 봄햇빛을 받아 꽃을 피우려면 잎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봄이 된 뒤에 다른 식물들과 같이 싹을 틔우면 경쟁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눈물겨운 뿌리잎의 모정. 문득 그들에게서 세상의 부모들을 본다. 자식대신 비바바람을 맞고, 자식을 위해 허리가 굽을 정도로 일하며 뒤돌아서서 눈물을 흘리는 키 작은 세상의 부모들. 뿌리잎을 보면 그래서 눈물이 난다. 이 가을엔 산과 들에서 만나는 뿌리잎을 아프게 밟지 말자. <상임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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