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에 사는, 독실한 불교신자인 언니가 자기가 다니는 절에 한번 가 보자고 한 것이 꽤 여러 날 전 일이다. 제천에 호텔을 개업하고 바쁘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마침 지난 주말 갈 기회가 생겼다. 차편이 여의치 않으니 내 차로 절에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하기에 마음 먹고 가게 된 것이다.
 일요일 새벽 6시, 언니 외에 다른 보살 둘을 태우고 원주시 신림면에 있는 사찰로 차를 몰았다. 이미 준비한 떡이며 김치며 절에 필요한 음식들을 가득 싣고 새벽 안개를 가르며 산사로 향하는 기분은 말할 수 없이 상쾌했다.
 언니를 중심으로 불심이 깊은 신자들이 모여 매월 첫 번째 일요일마다 삼천 배를 올리는 기도 모임을 만들었단다. 어느 새 삼천 배를 시작한지 일 년이 지났고 앞으로도 삼천 배는 이년 더 지속된다고 한다.
 언니는 제천에 내려와 산지 삼십 년이 다 되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어 있었다. 오늘 새벽에도 한시에 일어나 이미 천 오백 배를 마치고 나온 터라고 했다. 얼치기 불교신자인 내가 보기에 언니의 수행은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고 그녀의 정신세계는 과연 어떤 것인지 호기심이 일었다.
 제천에서 삼십분 넘게 차를 몰아 강원도 소재 사찰에 도착하고 보니 산안개가 자욱하게 끼어 있었다. “응화난야”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사찰은 ‘절대 간섭을 받지 않고 승려가 거처하는 곳’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했다.
 주지이신 법운스님께서는 눈빛이 강렬하고 구리빛 피부를 하고 있었는데 오랜 시간 산중 사찰에 기거하며 내공을 다진 흔적이 완연했다. 혼자 지내며 수행을 하고 싶은데 자꾸 신도들이 찾아와 성가시다는 말씀을 서슴없이 할 정도로 거침없는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스님께서는 약초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계셨고 능수능란하게 다기를 다루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아 보였다. 스님께서 주시는 보이차, 녹차, 천삼차 등을 거듭 마시다보니 잠이 덜 깨 몽롱하던 머리가 맑아지며 비로소 강원도 산중의 청량한 기운이 피부로 느껴졌다.
 승랍(僧臘) 34년 되신 스님께서 사재를 털어 지으셨다는 사찰은 천기가 내려오는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사람을 매료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스님께서는 날카롭고 다소 비판적이셨으나 신도들을 감동시키는 묘한 마력을 지닌 분이셨다. 그런 힘 때문에 전국에서 신도들이 찾아드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따뜻한 차로 몸을 녹이고 밖으로 나가 법당 위쪽으로 올라가보니 예사롭지 않은 크기의  약사여래불이 서 있었고 그 위로 산신각, 공(空)각이 위치해 있었다. 신도들은 아래쪽에 위치한 회랑에서 죽비에 맞춰 삼천 배를 시작하고 있었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산사의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그들이 절하는 모습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들이 저토록 간절히 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삶이란 무엇이고 또 인연이란, 사랑이란, 탐욕이란 무엇인가... 무수한 상념들이 이어졌다.
 그들의 모습은 경건했고 감동적이었고 또 아름다웠다. 이미 그들의 얼굴에 사리사욕은 없는 듯 했고 그 이상의 경지를 추구하는 듯 보였다. 오백 배를 마치면 약간의 휴식시간을 갖고 또 다시 의식이 이어졌다. 처음 오백 배가 힘들고 마지막 오백 배를 하며 끝으로 향해갈 때 그들이 느끼는 법열(法悅)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고 했다. 하루 종일 절 수행을 하며 자신을 내려놓는 일을 할 때 어찌 특이한 각성의 순간이 없을까 싶었다.
 그들에 합세해 나도 몇 차례 절을 하며 산란한 마음을 가다듬었다. 주기적으로 들려오는 죽비소리가 마치 내 영혼을 향한 것인 양 들렸다. 오십이 넘어도 차분해지지 않고 변함없이 흔들리는 내 영혼이 그들의 간절한 염원에 힘입어 맑고 차분해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아침 안개가 걷히면 사찰 아래쪽으로 와불의 모습을 한 산등성이가 나타나 장엄하기 그지없다며 그 풍경을 보고 가라는 스님의 말씀을 뒤로하고 산사를 떠났다. 모쪼록 절 수행을 하는 불자들의 염원이 이루어지길 진심으로 빌었다. 언젠가 꼭 다시 한 번 찾아오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멀리서 희붐하게 아침이 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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