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서울 강남의 고급 고층아파트를 민간 헬리콥터가 충돌한 뒤 추락한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사고 헬기는 LG전자 소속으로, 헬기를 조종하던 베테랑 박인규 기장과 고종진 부기장이 모두 안타깝게도 목숨을 잃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으로 아파트 주민의 2차 인명 피해는 없었다. 충돌시 받은 충격으로 38층짜리 아이파크 아파트의 21층부터 27층까지 창문이 깨지고 외벽의 상당 부분이 파손됐다.
추락하기 8분 전 정식 허가를 받아 김포공항을 이륙한 사고 헬기는 잠실 선착장에서 LG전자 임원들을 태우고 전주 공장으로 향할 예정이었다. 사망한 기장과 부기장은 공군 시절 오랫동안 대통령 전용기를 몰았을 정도로 조종 실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특히 지난 99년부터 LG의 수석기장을 맡아온 박 기장의 비행시간은 7000시간에 이르며 사고 헬기만 2759시간 운항했다. 사고 당시 이 아파트 일대는 안개가 짙은 상태였다.
항공당국은 사고 헬기가 김포공항을 출발해 한강을 따라 정상 경로로 시계비행을 하다 착륙을 앞두고 경로를 벗어나 아파트를 들이받은 것으로 추정했다.
사고원인에 대해선 짙은 안개로 인한 항로 이탈과 장비 결함 등의 가능성이 거론되고 있다. 고도계와 GPS장비 등을 장착한 이 헬기는 영국 왕실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VIP 수송에 애용되는 최신형 고급 기종이다.
전문가들은 기기 결함보다는 시계비행 중 안개로 인한 항로 이탈 가능성에 더 무게를 두는 분위기다.
사고 직후 아파트 주민들은 옆 동도 안 보일 정도로 안개가 심했는데 어떻게 비행이 가능했는지 의아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사망한 기장은 안개를 우려해 출발 한 시간 전 회사측에 김포에서 출발할 것을 건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잠시 후 비행에 나섰고 결국 사고로 이어졌다. 네티즌들은 임원의 편의를 위해 기상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무리한 운항 지시가 있었던 것 아니냐며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LG전자는 기상 상태가 좋아졌다며 기장이 스스로 비행을 결정했다고 해명했다. 하지만 유족들의 증언은 이와 다르다.
전문가의 숙련된 판단을 무시한 윗선의 무리한 지시가 있었는지 철저한 조사가 요구된다. 국토부는 블랙박스의 분석작업을 통해 정확한 사고원인을 가린다는 방침이다.
국내에서 헬기가 건물과 충돌한 사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외국에선 지난 1945년 B-25 미군 폭격기가 짙은 안갯속을 비행하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 충돌한 적이 있고, 지난 1992년 네덜란드 스키폴공항에서 보잉747기가 이륙 직후 아파트 단지에 추락한 사례가 있다.
고층 빌딩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국내 도심 환경을 고려할 때 항공물체로부터 충돌위험을 차단할 수 있는 세밀한 안전대책이 시급히 강구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 사고 헬기가 충돌한 지점은 지상 90m 부근이다. 이 정도 높이의 건물은 서울 시내에만 240개이며 50층 200m 높이의 건물도 강남과 여의도에 18곳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지상 수송수단에 비해 빠르다는 이유로 최근 들어 이용 빈도가 급증하고 있는 자가용헬기의 안전관리규정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늘 사고 후 뒷북치는 식의 행정이 안타깝지만 아까운 인재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당국은 확실한 항공안전대책을 강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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