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애(충북대 교수)

   스모그현상으로 한치 앞도 보기 힘들게 희뿌연 날씨 탓에 착잡했던 기분이 맑게 열린 하늘을 보게 되니 온 세상이 밝아졌다. 구수하고 달콤한 냄새와 따스한 온기를 느끼며 차 한 잔을 마시다 문득 벽에 붙은 달력에 눈이 멈추었다. 어느새 한 장 밖에 남지 않은 달력. 보름정도 지나면 새 것에 밀려나야 할 판이다. 세월의 흐름은 시위 떠난 살과 같다더니 참으로 빠른 시간의 속도를 더욱 절감하는 송년의 달이다. 유년과 학창시절의 12월은 즐거움에 들뜬 달이었다. 긴 겨울방학이 시작되었고,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즐길 수 있으며 제야의 종소리를 들으며 새해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에 한껏 부풀었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생활이 넉넉하진 않았어도 12월은 한 달 내내 거리 곳곳에 울려 퍼지는 성탄 캐럴이 사람들의 발걸음을 경쾌하게 만들었다. 서점과 문방구에 카드와 연하장을 사려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풍경은 이제 앨범 속 빛바랜 사진이 되었다. 카드나 작은 선물에 정성을 담아 서로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했던 정겨웠던 관습은 단문의 문자나 스티커 전송으로 대체된 지 오래다. 12시 통금시간이 엄격했던 시대, 성탄 전야에는 통행금지가 없어지고 밤새도록 눈 쌓인 길을 거닐며 뽀드득 밟히는 눈 소리를 듣는 것만도 행복이라 생각했었다. 특별한 이벤트가 없었어도 밤새 떠들며 밝아오는 새벽을 함께 맞았던 즐거운 기억 속 친구들이 그립다.

   부모가 되었을 때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아이들에게 줄 선물 고르는 일이 해마다 적잖은 고민거리였다. 아이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산타 할아버지를 대신하는 일도 쉽지 않은 과제였다. 아침에 눈 뜨기가 무섭게 크리스마스트리에 걸려 있는 선물을 확인하고는 산타할아버지가 정말로 자기 소원을 들어주었다며 뛸 듯이 기뻐하던 천진난만한 모습들이 눈에 선하다. 진실로 산타가 있다고 믿는 아이들의 실망이 두려워, 카드의 글씨체를 해마다 바꾸느라 팔이 아프도록 글씨 연습이 이어졌다. 아이들이 더 자라서 산타의 존재를 반신반의했을 때는 산타를 사칭하는 엄마 아빠의 확실한 증거를 잡겠다며 늦은 시간까지 버티던 아이들 때문에 밤잠을 설쳐야 했다. 몰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잠들었다가 다음 날 깨어나 속상함에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들의 모습도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아이들에게는 선물의 종류도 가격도 중요치 않았다. 그저 나쁜 일 하지 않아 산타 선물을 받을 수 있었음에 안도하고 기뻐하였다.

   일부에선 크리스마스를 맞아 도를 넘는 선물의 출현이 부모를 난감하게 만들고 있다. 소 자녀 가정이 대세인 요즘 자녀를 위한 것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부모들의 빗나간 사랑과 허영심을 악용하는 상술이 등장한 것이다. 합리적인 구매를 원하는 알뜰하고 현명한 소비자들이 고가 매장을 외면하는 시장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마케팅전략에 휘말린 소비자들이 있기에 어린이용 고가선물이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 초등학생용 필통이 5만원을 훌쩍 넘고, 수 십 만 원대의 가방, 완구, 그리고 의류, 한 달 초봉에 가까운 전집류 서적. 이쯤 되면 어린이용 선물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게 건네는 뇌물 수준이다. 부모의 가치를 선물의 가격으로 인정받으려는 과시욕의 표출이다.

  부모들은 선물 가격이 부담스러워도 자신의 자녀가 친구들이게 푸대접을 받을까봐 걱정되어 무리한 소비를 한다고 말한다. 값비싼 물건을 소유하는 후광이 있어야 아이가 자신감을 가질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서, 그런 생각과 행동이 오히려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우려를 하면서도, 남 따라 장에 가는 길을 택하고 있다.

   금전에 가치를 두는 생활에 익숙해질수록 마음은 점점 가난해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자녀에게 고가의 선물 공세 대신 마음이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마음이 풍요로운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라 했다. 마음이 부자이면 퍼내도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여유가 생겨 언제나 당당한 자신감을 가질 수 있지만, 물건이나 금전에 집착하게 되면 점점 더 그 웅덩이 빠져 헤어나지 못한다. 혹독한 경쟁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는 늘 자신을 남과 비교할 때가 많다.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만을 견주면 항상 부족함에 갈증을 느끼지만 아래를 보고 살면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어 저절로 행복해진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녀들에게 자기만의 성취 목표를 세워 노력하게 가르치는 것이 중요하다. 주위를 돌아보면 동행하고 나누어야 할 이웃들이 많다. 연말 이웃과의 동행, 나눔의 실천은 마음을 풍요롭게 하는 쉬운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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