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 수 길 (논설위원, 소설가)

                                                

 의원님! 요즘 눈이 제법 내렸습니다. 철없는 애들이나 눈에 콩깍지 낀 젊은 연인들이야 백설 덮인 세상이 낭만천지로 보이겠지만, 애타는 중소상공인, 아침에 눈뜨기 무서운 노동자와 무직청년, 조기 퇴직한 중년, 배추밭 갈아엎은 농민, 의지거리 없는 극빈노인, 재기를 포기한 노숙자, 이들은 거센 눈발이 원망스럽고 닥치는 추위가 원수일 겁니다. 같은 세상, 같은 풍경도 이렇듯 처지에 따라 바라보는 심경이 다르고, 감당할 고통의 무게가 다릅니다.  

 때가 때인 만큼, 의원님인들 백설 천지에 낭만 찾을 여유가 있겠습니까? 연말은 코앞이지, 총선과 지방선거도 바작바작 다가오지, 기초 광역의원 공천딱지는 단 한 장씩인데, 인물은 오직 나뿐이라고 매달리는 과대망상자는 많지, 갈등국회는 앞이 깜깜하지, 예산안과 민생사안은 산적했는데 국회회기는 야금야금 지나가지, 의원들이 본업 제쳐놓고 딴 짓 한다고 눈총은 따갑지, 철도노조는 국민발목잡고 파업 중인데, 방공식별구역(ADIZ)을 놓고 3국(미중일)의 틈바구니에서 우리입지는 불안하지, 북의 김정은은 제 고모부 잡아다 처형하고 ‘종파분자숙청’한다고 난리치는데 무슨 일을 또 저지를지 모르지, 내외국사가 두루 복잡한데, 해법 찾기에 골몰하는 의원님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의원님들은 늘 바쁘시겠지요. 

 차기 선거에 출마공천장도 받아야지, 표밭관리를 위해 지역행사장에 얼굴 내밀고 허리굽히며 악수도 해야지, 당선에 표 보탰다고 생색내는 이들 애경사 챙기고, 내 표 깎아먹을 출마예상자 견제하거나 달래서 주저앉혀야지, 법망 피해 요령껏 선거자금도 마련해야지, 내 앞가림만도 코가 석자인데, 소속당의 당론 따라 보조를 맞춰야할 일도 한두 가지가 아니지요. 

 보도를 보니, 장외에서 농성하던 야당이 천막을 거두고 나니, 이어서 역할교대로 여당의원들께서 거리에 나서 팔뚝질을 하셨더군요. 여야 의원님들이 정답게 시기까지 조절해가며 당리당략을 위한 대열에 동참 하시자니 왜 안 바쁘시겠습니까? 어디 그 뿐입니까. 상대 당의 기를 꺾을 독한 막말을 내 뱉는 동료의원에게 박수를 보내는 의리도 지켜야지, 극성스런 보도진 앞에서 톱기사로 뽑힐만한 돌출행동으로 지역구민들 뇌리에 자신의 위상을 각인시켜야지, 그 와중에 일부의원님은 회의 중에 성능 좋은 휴대전화로 정다운 ‘여보’의 신상상담도 해 주시고 육체미 좋은 여성의 동영상도 감상 하셨다니, 얼마나 바쁘시겠습니까? 동분서주로 날고뛰어도 몸이 뜻을 따르지 못할 만큼 다사다망하실 겁니다.

 그러나 고무신과 막걸리에, 혹은 학연과 지연, 혈연에 한 표를 던지던 옛날과 달리, 유권자들은 깨어가고 있습니다. 의원님이 내밀어 악수하는 손이 건성이면, 그 손을 잡는 유권자의 손도 냉정합니다. 평소 뻣뻣하던 고개가 선거철 임박해서 갑자기 겸손해지는 그 행태를 보며, 유권자들은 분노와 원망을 감춘 채 속으로 가슴을 치고 있을 겁니다. 의원님 눈에 그게 안 보인다면 콩깍지가 낀 탓이지요. 진실한 의원님은 여야 안 가리고 유권자가 알아봅니다. 

 대선을 부정(장하나)하고 현대통령의 위해를 예고하는 듯한(양승조), 철딱서니 없거나 무례한 막말로 의원품위를 손상하고 여론을 혼란시키는 함량미달 의원을 감싸는 야당이나, 철없고 무지해 그러려니 여기고 귓등으로 흘리고 말 것을, 거리에 나서 팔뚝질하며 규탄하는 여당이나, 국민들 눈에는 그 밥에 그 국입니다. 놔둬도 민심이 냉혹하게 심판할 일인데.... 

  근자에 ‘미디어리서치’가 내 놓은 정당지지율은 새누리당 40%, 안철수 신당 32%, 민주당 14%랍니다. 철없는 의원님 말씀이나 그 걸 감싸는 야당의 속내(?)를 백번 존중해서 대선을 다시 치른들, 국익에 무슨 변화, 무슨 득이 있겠습니까? 현대통령의 국정지지율 54%(12.13 갤럽여론조사)를 뒤엎을 거라 믿는다면 착각에 과대망상이 아닌지요? 대선당시 문재인 후보의 득표 48%를 고스란히 유지한대도 어불성설일 겁니다. 뻔한 결과에 태어나지도 않은 신기루당의 반쪽 지지도 못 받는 제 1 야당의 상처만 깊어질 겁니다. 만약 못 먹을 감 찔러나 보자는 속내가 있어서라면, 눈에 콩깍지 낀 정도가 아니라 아예 민심을 못 보는 거지요. 

 북의 김정은이 저 난리를 치고 내외정세가 갈수록 복잡해지는데 국정원 손발 묶자는 안보관이나, 예산안을 볼모로 국정발목 잡고 당론관철이 우선이라는 시국관 역시 의원님들 눈의 콩깍지 탓이 아닌가요? 법률적 판단이 필요한 사안은 사법기관에 맡기고, 입법권을 수임한 의원님들은 콩깍지 뗀 눈으로 민심을 바로보시고 본연의 임무에 진력하심이 어떨지요. 의원님들 입버릇대로 민생의 고통을 덜어주는 정치. ‘민주주의’, 그 정도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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