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

다음엔 용서 할 수 없어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가볍고 은밀한 흔적들
생선과 맞바꾼 몇 개의 발자국 속엔
아직도 비린내의 안쪽을 훔쳐봤을 집요한 눈빛이 묻어있고
문 열린 주방 한 켠 함지박에 담가놓았던
저녁의 분량만이 온데간데없이 썰렁하다
도둑맞은 함지박 속의 물들은 꺼른하다
아직도 미련을 놓지 못한 듯 우물거리고 있는
갈치의 미세한 비늘만이
느릿한 공복의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는 한때
함지박 속의 사연들은 내 오랜 날들의 청빈을 닮았다
쉽사리 쏟아버리기엔 못내 아쉬운 애증의 볼모같은 것
나는 오랫동안 비린내 어린 시장기를 구해와
어스름의 도둑들을 초대해 왔다
한낮의 환한 부주의를 풀어 놓고서
공복의 저녁들을 키워 왔다
아끼면 아낄수록 말썽을 부리는 무수한 날들의 불청객,
소금 한줌 집어와 좀처럼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어스름들에게
희고 짭짜름한 충고를 야광처럼 던져주었다
    

■ 시 당선소감 / 정순

● 1959년 전북 완주 출생
● 2011년 평사리문학대상 대상 수상
● 차령문학 동인
● 한국 방송통신대 국어국문학과 재학


더 많은 언어 찾으라는 채찍
어릴 적 내 꿈은 국어선생님이었다.
산과 들과 꽃들의 선생님이 되고 싶었고 그 교실 안에서 올망졸망한 말들의 선생이 되고 싶었다. 중학교 2학년, 어느 가을 이었을까? 수업료를 받지 못한 학교는 나를 집으로 돌려보냈고 그 이후의 삶들은 좀처럼 국어선생과 관련이 없었다. 더는 꽃들의 이름과 계절의 행방에 대하여 궁금해 하지 않았으며 내가 성장통을 빠져나와 어떤 세상으로 가는지에 대해서도 침묵해야 했다.
실어증 같은 날들을 명치께에 묻고서 세월을 보낸다는 것, 그러나 그 잃어버린 말들의 안쪽에 더 많은 내가 더 많은 그리움의 언어들과 더 많은 슬픔의 나라들이 더 오롯이 숨 쉬고 있을 줄이야!
그게 시였다. 무심코 마주친 시는 나를 아니, 나의 문장들을 논두렁 저쪽으로 자화상처럼 떠돌게 했으며 돌아오는 길엔 꽃들의 조언까지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말들 속에서 더 많은 언어들을 찾아낼 수 있는 것, 그런 시를 쓰고 싶다.
끝으로 이곳까지의 나를 챙겨주신 차령문학 박경원 선생님과 김은실 시인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나의 등불 한 사내와 내 소중한 분신 재옥, 재복, 재승이와 함께 당선을 자축하며 난문을 건져 올려 새로운 길을 열어주신 심사위원님, 자리를 펼쳐주신 동양일보에도 깊은 감사를 드린다.



시 부문 심사평

길고양이 통해 인간의 삶 접근...고정관념 벗어나

선자에게 넘겨진 응모작품(469편)들을 숙독하고 느낀 점은 모두 일정수준을 갖췄으나 새롭게 내놓을만한 작품으로 가능성이 돋보이는 작품을 찾기는 쉬지 않았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작품들이 엇비슷한 것은 전국 각지에서 벌이고 있는 각종 문학강좌의 탓이 아닌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념적이고 상투적인 어휘들이 난무하고 난삽한 작품들이 많아 아쉬움을 떨칠 수 없었다. 
선자의 손에 마지막까지 우열을 겨룬 작품으로는 김현승의 ‘엄마의 완경기’와 김지숙의 ‘주막’ 그리고 권인희의 ‘고등어 굽는 여자’ 와 정 순의 ‘길고양이’란 작품이다. 
김현승의 ‘엄마의 완경기는 꽃피는 봄철이 오면 고향집 앞뜰에 채색된 봄이 피는 엄마의 우주를 그려내고 있다. 완경기란 폐경기를 말하는데 이는 여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의 전환기를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착상이 돋보였다. 
김지숙의 ‘주막’이란 작품은 장삿길 떠난 아들을 위해 사거리 큰 도로 옆에 작은 주막을 차리고 기다리는 모정을 그리고 있다. 강나루가 사라지고 버스정류장이 생기고 아들이름을 내건 주막에서 인생의 석양을 맞는다. 세상을 뜨고 빈 집만 남아 노모의 가슴처럼 기다림의 애틋한 정감을 더하고 있다.
권인희의 ‘고등어 굽는 여자’에서 달빛에 고등어를 굽는 여자의 삶 속에서 여자의 삶이 고등어를 닮아가는 팽팽한 삶 그물자락을 바다 한가운데서 펼쳐 보이며 여자가 그물 옷에 묻은 저녁을 털어내고 있다는 등 바람의 흔적이 끊이질 않는 작품이다.
정 순의 ‘길고양이’란 작품은 삶이란 명제에서 길고양이와 인간의 삶이 하나로 오버랩되고 있다.  콜렛은 ‘고양이와 함께하는 시간은 절대 낭비되는 시간이 아니다’라고 했고 웨슬리 베이츠는 ‘고양이가 있는 집에는 특별한 장식물이 필요 없다’고 했는데 집고양이가 아닌  길고양이와의 관계에도 적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진다. 다각적인 상황에서 나타나는 동시다발적인 것들이 삶의 실체 속에서 적절한 관계 접근을 통해 내포한 고정관념을 벗어나고 있다. 
정 순의 길고양이를 당선작으로 밀며 앞으로 튼실하고 절제된 탈관념의 사물시 쓰기에 정진하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정연덕(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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