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주 희(침례신학대학 교수)

 사랑은 흑백 풍경에 색체를 입힌다. 무연한 것들에 관계가 생겨나고, 책임을 부여하며, 지속을 모색하게 한다. 지키고, 돕고, 애쓰는 수고가 당연해 진다. 알지 못했던 종류의 기쁨과 설렘이 일고, 일상이 심오한 풍경으로 바뀐다. 사람의 비루함을 덮고, 그 위에 연대의 꽃무늬를 그려넣게 한다. 비참할 시간에 의미가 주어지고, 무참할 실패에 고귀한 품위가 더해진다. 그래서 세상을, 삶을 휘황하게 한다.
 공지영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는 천주교와 한국전쟁이 배경인데 극악스러움을 표출하는 무리와 선의를 실천하는 이야기들을 함께 배치했다. W시(왜관) 베네딕도 수도회의 젊은 사제 정요한 수사를 중심으로 사랑하고 사랑받는 일, 사랑하다 상처받는 일, 상처를 넘어서는 일들을 풀어놓는다. 종교적 인물을 통해 우리 삶의 근본적인 가치들을 살펴보고 싶었다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과 사람을 사랑하는 일, 어떻게 사랑해야 하고 어떻게 이별에 대처할 것인가,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를 인물들의 삶을 통해 조근조근 점검해 나간다. 이 소설의 배경사건은 한국전쟁기의 실화이다. 흥남철수 때 십여 명이 타야하는 작은 배에 목숨을 걸고 14,000명을 실어 거제도까지 무사히 구조한 마리너스 선장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지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는데, 마리너스 선장은 그 일이 있은 뒤 수사가 되어 미국 뉴튼 수도원에서 평생 살았다. 수사가 되려는 젊은이들이 없는 뉴튼 수도원을 인수하러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사람들이 그곳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나 그 때의 구조 과정을 이야기하고는 이틀 만에 세상을 떠난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이 이야기들을 바탕으로 삼았다.
 소설의 큰 틀은 정요한 수사가 신에게 헌신을 다짐했지만 속수무책으로 빠져든 이성과의 사랑과 친구 수사들의 죽음등 여러 일들을 겪으며 방황하고 갈등하다가 나름의 답을 얻어나가는 통과의례적인 성장소설 형태를 하고 있다. 성장소설은 특성상 인간 세상에 대한 환멸을 통해 성장하는 구조를 하게 되지만 다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통해 주인공에게 그 환멸을 넘어설 개안의 사고를 갖도록 한다는데 특성이 있다. 이 소설은 사랑하다 상처 받는 일에 대한 이야기를 중요한 부분으로 보아도 좋을 것 같다. 참혹하고, 절실하고, 아름답고, 눈물겹다. 사랑 때문에 상처받고, 그 상처 때문에 고통을 겪는데 어쩔 것인가에 대해 그래도 사랑해야 한다고,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다고 상처를 넘어 사랑할 것을 강조하는 것을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이 시련을 다 이긴다 해도, 우리가 심지어 여기서 하느님을 위해 순교한다 해도, 아니 자네와 내가 여기서 이 모든 사람을 무찌르고 탈출한다 해도 우리가 이 시련을 사랑이 아니라 악으로 참아내는 거라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게 되는 거라네. 어제 저녁 경당에서 졸면서 경배드릴 때 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 예수에 대한 사랑, 진리에 대한 사랑으로 이 시련을 수락했네. 하느님께 예, 하고 말씀드렸어. 나는 알았네. 저들이 우리에게 빼앗을 수 없는 단 한 가지는 그들이 억지로 우리에게 준 이 고통을 우리가 기꺼이 받아 사랑에게 봉헌한다는 것이네. 그건 저들이 우리를 죽인다 해도 어쩔 수 없겠지. 우리는 참으로 존귀하며 우리는 이 모든 우주의 주인인 분이 특별히 지어내신 귀염둥이들이 아닌가 말일세. 이 짧은 세상이 끝나고 설사 죽어보니 모든 게 무(無)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저들과 나 둘 중 어떤 역을 맡겠느냐고 묻는 신에게 저들처럼 학대하는 역을 맡지는 않겠다고 분명히 말씀드릴 걸세. 그러자 모든 고통의 의미가 내게로 다가왔네. 나는 적어도 무의미의 고통에서는 벗어났네…….’

  무의미한 삶의 고통에서도 벗어나는 일. 우리가 진짜로 고통스럽게 여겨야 할 것은 어쩌면 무의미, 무기력일지도 모른다. 모든 에너지 다 방전한 듯 허청대는 심령이라면 상처의 치열한 생생함일지라도 힘차게 수락하면서 또 살아내야 하지 않겠느냐는 그런 소설 속 인물의 이야기에 공감하면서. 야곱의 사다리를 염두에 둔 소설 제목은 사랑이 위태로와 보이기도 하지만 푸르게 높이 닿는 길이라는 상징으로 읽어도 좋겠다. 사랑하다 상처를 입었어도, 다시 사랑할 힘은 회복해야 살겠다고. 상처도 괴로운데 사랑할 수도 없으면 너무 가엾지 않은가. 사랑할 수는 있어야 우리가 살 수 있으려니, 사랑보다 나은 대안이 따로 없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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