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자/수필가

  갑오년 새해를 맞은 지도 어느새 일주일이다. 별로 한 일도 없이 일주일을 보냈나 하는 허무감이랄까 초조감 같은 게 벌써 밀려온다.

  새해가 되면 누구나 희망에 부풀어 자기만의 각오와 목표를 새롭게 하고 그 목표를 향하여 결연한 의지를 다진다. 정확하게 말하면 새해 첫날은 지난해 마지막 날의 다음 날일 뿐인데 사람들은 의미를 부여하며 매듭을 지어놓고 새롭고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게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 일인가.

  ‘올해는 꼭 담배를 끊어야지’  ‘올해는 꼭 술을 끊을 거야’ ‘살을 빼고 말거야’ 처럼 자기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1일 1선’ ‘매일 1시간운동’ ‘한 달에 두 권 책읽기’ 등등 생산적인 일을 실천하겠다고 결심들을 다지는 사람들도 많다.

  새해 아침 새 달력을 꺼내놓고 먼저 한 일은 여느 때처럼 가정의 기념일과 행사, 가족의 생일에 빨간 동그라미를 치는 일이었다. 나이가 들고 보니 해마다 거창한 계획을 세워봐야 실천하기는 어렵다는 심드렁한 생각이 가슴 밑바닥에 깔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초등학교 3학년쯤 방학계획을 세웠던 일을 시초로 60여년을 해마다 새해 결심으로 정했던 일이 얼마나 많고 다양했던가. 그러나 현실의 나는 내 꿈과 먼 사람이 되어있다는 자괴감 같은 것을 지울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그 계획들이 내 인생을 이끌어 왔다는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거창하지 않으나 내 나름대로 꼭 실천하고 싶은 것을 메모장에 적어보았더니 15가지나 되었다. 예를 들면 매일 ‘성서읽기’ ‘맨손체조하기’ ‘원고지 5장 이상 글쓰기’ ‘책읽기’ 같은 아주 소소하고 쉬울 것 같은 작은 것 들이었다. 모든 실천은 기록으로 남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에 15개 항목이 들어가는 1개월 단위의 점검표까지 만들었다. 소소한 것들이 모여 하루를 충실하게 채운다면 그 하루하루가 모여 1년이 보람찰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1주일이 지난 지금 나는 점검표를 보며 또 한심하다. 겨우 반 정도만 동그라미가 처져있기 때문이다.  ‘30분 이상 산책하기’ 는 날씨가 추워서 못한다고, ‘TV 시청시간 줄이기’는 재미있고 얻을 것도 많아서 이고, ‘단전호흡 20분’은 시간이 모자라서 라고 핑계를 대면서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있는 나를 본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인 것이다. 이 맹랑한 말을 경계하여 삼일작심(三一作心)(?)까지 했는데 말이다. ‘천리 길을 가려면 신발 끈부터 단단히 매야 한다.’ 며 나 자신과 손가락을 걸던 그 결심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하긴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일이 어디 한 두 번이던가.

  하지만 나뿐만이 아니란다. 외국 어느 대학교수들의 연구에 따르면 새해 결심을 일주일 이상 지키지 못한 사람들이 77%나 되었다니 조금은 위안이 된다. 새해 결심 중에서 한 가지라도 2년 이상 지켜나간 사람은 20%가 채 되지 않았다니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가 그만큼 어렵고 작심삼일은 동서양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인가보다.

  어느 석학은 그렇게 말했다. 작심삼일이 된 것을 깨달았으면 실망하거나 좌절할게 아니라 그 시점에서 다시 시작하고 또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목표의 절반은 달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호랑이는 못 잡아도 고양이는 잡지 않겠느냐는 것이니 공감이 가는 말이다. 아니 인간의 속성이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합리화하고 있는 내 속셈이 들여다보인다.

 


   새해 결심이 작심삼일이 되는 건 어쩌면 그것을 지키지 않아도 큰일이 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저 그렇게 살아갈 수가 있을 뿐 치명적이지는 않기 때문이다. 폐암에 걸린 사람은 담배를 끊을 수 있고, 간암에 걸려본 사람은 술을 끈을 수 있다고 했다. 절실한 사람만이 자기를 바꿀 수 있는 것이다.

  내일 죽을 것처럼 오늘을 살라고 했다. 내일 죽을 사람보다 더 절박한 이가 있겠는가. 죽음이 늘 우리 곁에 있다고,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 인생이 한없이 값지고 소중하여 촌음을 아끼지 않겠는가. 그래서 남은 삶을 누구보다도 즐겁고 보람 있게 살아야 할 의무가 주어지는 것이리라.

  하늘나라에 가면 두 가지 심판이 기다리고 있단다. 첫째는 “너는 행복했느냐?” 이고

둘째는 “너는 남을 행복하게 해주었느냐?” 란다. 이 두 가지 질문에 “예”라고 크게 대답 할 수 있다면 만족한 삶이 아닐까. 그러기 위해서는 더 잘 살아야 할 막중한 책임이 있다. 하지만 나는 어느새 이런 말을 중얼거리고 있다.

  너무 잘하려하지 말라하네 / 살고 있음이 이미 이긴 것이므로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하네 /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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