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수애(충북대 교수)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겨울 방학기간에는 중학교 입학의 설렘과 함께 교복과 가방이며 중학생이 되어야 쓸 수 있는 노트나 펜과 같은 학용품을 장만하는 일이 큰 즐거움이었다. 문방구 대신 대형 서점에 들러 영어와 한자 펜글씨 교본을 사면서 새로운 공부에 대한 호기심에 들뜨기도 했다. 지금으로 보면 선행학습이었던 셈이다. 잉크를 찍어서 펜으로 글씨를 쓰는 것도 중학생이 되어야 허용되었다. 잉크병에 펜을 넣다가 잘못해 잉크를 쏟아 옷이며 주변을 온통 파랗게 물들여 곤혹스럽던 기억도 남아있다. 자주 잉크를 찍지 않아도 펜보다 훨씬 편리하게 쓸 수 있었던 만년필은 그리 흔하지 않았고, 중학교 입학선물로 받았던 만년필은 지금도 간직하고 있는 추억의 물건이다. 4줄의 붉은 선이 그려진 영어전용 노트와 커다란 네모 칸 아래에 한자의 음과 훈을 적을 수 있는 작은 칸으로 이루어진 한자 노트를 소유하는 것은 드디어 아동기 탈피를 실감케 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한자 펜글씨 교본에 있는 희미한 글씨 위를 따라 덮어쓰기를 하면서 글씨 연습을 하다 보면 점점 글씨 모양도 좋아지고 글자의 뜻을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그 당시 학계에서는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었지만 중학교 국어 책에는 필요한 경우 한글 옆 괄호 속에 한자를 병기하였고, 1800개의 한자는 익혀두어야 할 상용한자로 정해져 있었다. 중학생이 되어 그동안 알고 있던 단어의 한자를 알게 되면서부터 그 어휘의 뜻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고등학교에 올라가서는 괄호 속에 병기되었던 한자마저 없어져 완전한 한글전용의 시대를 맞았다. 문법책 이름은 말본으로 바뀌고 명사는 이름씨, 동사는 움직씨. 형용사는 그림씨, 부사는 어찌씨로 바꾸어 부르는 것이 아주 어색했었다. 이러한 과도기에 국어선생님은 우리말에서 한자를 아주 쓰지 않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라며 우려하셨다. 신문을 읽거나 고전을 이해하려면 한자를 모르면 안 된다고 강조하시며 우리에게 한자교육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어려운 한자 공부를 대부분의 학생들이 싫어하였는데도 국어 선생님은 음과 훈은 물론 쓰는 순서와 부수를 찾아 익히는 것을 장려하셨고 잘 따라오는 학생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덕분에 나는 한글전용시대의 또래들보다 한자를 혼용한 신문을 읽는데 별 어려움이 없었고 한글의 동음이의어나 고사 성어를 이해하는 데도 자신감이 붙었었다. 요즘 마음을 다스라는 데 최적이라 생각하여 새롭게 시작한 명심보감 공부도 혼자서 즐겁게 독학할 수 있어 고교 시절 국어선생님께 다시금 감사한 마음을 새기게 된다.         

 


  얼마 전부터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학자들과 한자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학자들 간에 논란이 일고 있다. 한글 전용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정신세계의 주체성을 살리기 위해서도 우리말을 잘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자를 사용하면 순수한 우리말이 사라질 우려가 있고 한자교육은 자칫 사대주의에 빠질 수 있다고 걱정한다. 우리나라 문맹률이 0%에 가까워 모든 국민들이 쉽게 책을 접할 수 있고, 세계 제일의 정보화 국가가 된 것은 한글 전용 교육정책이 가져온 결실임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한글 전용 교육의 폐단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다. 우리의 일상용어 중 50% 이상, 학술용어 중 90% 이상이 한자어로 되어 있다고 한다. 그러니 한자를 모르고는 우리말인 국어를 이해하는데 많은 지장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한자 교육을 받지 않은 젊은 층에서는 학술용어를 국어로 옮기려고 하지 않고, 영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아졌다고 한다. 오히려 한자 대신 영어의 범람으로 인해 우리말이 오염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오랫동안 조상들이 써왔던 한자와의 단절은 전통 문화의 계승에도 어려움이 생길 것이다. 한자를 너무 모르면 역사나 사회, 경제, 고전서적들을 이해하기 어렵다. 일상생활에서도 잘못된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선거 때마다 거론되는 부동층(浮動層)을 不動層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고, 주야장천(晝夜長川)을 주야장창으로 잘못 쓰는 사람도 많은데, 한자어를 안다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이다. 한글보다 한자어를 숭상하거나 한자를 일부러 많이 쓰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순 우리말이 한자어보다 더 좋은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러나 우리 국어 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적절한 학령기부터 기본적인 한자 교육을 시켜 한글전용교육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 쓸모없는 한문이 아니라 일상용어나 인간의 도리를 가르치는 글을 중심으로 기초적인 한자를 교육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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