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영훈 진천군수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정부라는 ‘슈퍼 갑’의 예방적 살처분 명령에 ‘을’일 수밖에 없는 지방 자치단체장으로서의 무력감과 자괴감이 들었고, 한우 축산농이었던 자신이 누구보다 농민들의 아픔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농림축산부는 진천군에 AI(조류 인플루엔자) 발생지역 반경 3㎞ 이내의 닭 49만마리에 대한 살처분을 요구했고, 이에대해 유 군수는 한마리의 닭도 이상징후가 없는데 위험지역 3㎞ 이내에 있다는 이유 만으로 살처분 하라는 것은 축산농의 아픔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처사라며 반발했다. 그러나 예견된대로 ‘을’의 하소연은 ‘슈퍼 갑’의 명령에 하릴없이 묵살됐다.
가창 오리떼로부터 시작된 AI 공포가 점점 북상하더니 이제 우리 충북지역에서 현실화되고 있다. 그 공포는 죽음이다.
개인이든, 사회든, 국가든 한 주체가 앞으로 나아가는 길에는 항상 여러 갈래의 길이 나타난다. 그 선택의 길에는 최선도 있고, 차선도 있고, 최악도 있으며, 차악도 있다. 선택은 주체의 의지에따라 달라진다. 그러나 그 선택으로 인해 일어나는 반향이 크면 클수록 우리는 최선을 지향해야 한다.
그런 맥락에서 우리는 묻고 싶다. 일단 ‘묻고 보는’, 정부의 ‘묻지마 식’ 예방적 살처분이 과연 최선책인가.
예방적 살처분이라는 말이 지닌 ‘무차별성’과 ‘잔인성’에 우리는 주목한다.
정부의 예방적 살처분 명령은 확고하다. 위험지역을 중심으로 직경 6㎞ 범주에 포함된 오리와 닭은 씨를 말리겠다는 것이다. 물론 더 큰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서, 호미로 막을 것 가래로 막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강변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6㎞라는 계량화된 ‘죽음의 선’은 누가, 어떤 근거로 설정해 놓았는가. 그 선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생존할 수 있고, 그 선 안에 조금만 걸쳐 있으면 반드시 죽어야만 하는 생사의 갈림길은 어떤 객관적 논리를 담보하고 있는가. 탁상행정이요, 편의주의 행정의 표본이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국 말대로 ‘예방적 차원’에서 감염되지도 않은 수십, 수백, 수천만 마리의 오리와 닭을 모조리 죽인다면 AI 확산은 막을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학살’은 하수가 두는 최악의 수다. 모조리 죽이는데 확산될 까닭이 없다. 문제는 리스크 속에서도 ‘상생’을 찾으려는 노력과 연구가 동반돼야 한다는 것이다.
구제역 파동으로 많은 이들이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겪었고, 일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었다. 이번 AI사태로 인해서도 전북 김제의 한 농민이 자살했다.
예로부터 가축은 농민들에게 ‘식구(食口)’의 개념이었다. 가족과 매한가지였다. 생떼같은 자식들을 무고하게 죽여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 그것이 예방적 살처분에 대한 농민의 깊은 슬픔이다.
해법을 찾아보자. 유럽연합에서는 AI발생 농가의 가금류만 살처분 대상으로 하고 인근지역 가금류는 이동제한·금지시키고 있다. 베트남이나 중국은 백신 접종을 통해 예방에 주력하고 있다. 타산지석으로 삼아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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