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지루한 겨울 생활에 답답함을 느끼던 차, 친구들과 의기투합하여 간단한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화교인 후배가 친구들과 콘도를 빌려 여행을 하기로 했는데 일정이 취소돼 우리가 그 여행지를 다녀오기로 한 것이다.

 목적지는 경기도 포천에 있는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이 있던 곳일 정도로 풍광이 수려하다며 떠나기 전 간단한 브리핑을 받았다. 가는데 시간도 그리 많이 걸리지 않고 바로 콘도 근처에 호수가 있어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고 했다.

 1박 코스라 부담도 없고 오랜만에 여기저기서 모인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며 깔깔거리는 재미도 기분 전환에 좋을 터였다. 대전, 청주, 충주, 서울 등지에서 모여든 친구들이 산정호수 부근 콘도에서 합류한 시간은 점심때가 조금 지나서였다. 콘도에 여장을 풀고 창밖을 보니 바로 눈앞에 눈 덮인 겨울산이 우뚝 서있어 모두들 환호성을 질렀다. 

 모두 들뜬 기분으로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가 포천 이동갈비를 시켜 늦은 점심을 먹었다. 달달하고 연한 돼지갈비에 누군가 가져온 고급 와인을 한잔씩 하며 회포를 풀었다. 그러고 보니 친구 하나는 화교였고 두 사람은 대만에서 유학했던 친구, 다른 한 친구는 보스턴에서 십년 넘게 살다 온 케이스라 모두 외국생활 경험이 있었다. 나 또한 밴쿠버에서 6년 넘게 살았으므로 예외가 아니었다. 얼마 전 이 친구들과 노래방엘 간 적이 있는데 세 친구들이 모두 중국 노래를 불러 색다른 감회를 느낀 적이 있다.

 식사를 마치고 산정호수 산책길에 올랐는데 마침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산속의 우물 같이 맑은 호수라는 뜻에서 이름 지어진 산정호수는 겹겹이 둘러쌓인 산봉우리들과 어우러져  그야말로 비경을 연출했다. 예사로운 풍경도 눈이 덮이면 별천지로 바뀔진대 평소에도 낭만적인 호수풍경이 눈을 맞으며 더욱 신비스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우리 일행은 환호성을 지르며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고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새로운 세상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고 감탄사만 연발했다. 눈 내리는 호수 풍경은 우리의 마음을 동심으로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눈을 맞으며 둘씩 짝을 지어 호숫가 산책로를 걸었다. 때론 추억담을 때론 우리의 앞날에 관해 얘기하며 걷다보니 저 멀리로 작은 불빛이 보였다. 반가움에 잠시 들어가 보니 차도 팔고 간단한 간식거리며 허브제품을 파는 곳이었는데 백설공주가 살고 있는 곳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동화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다. 주인장이 자신이 구운 쿠키라며 건네 먹어보았더니 은은하고 특별한 맛이 났다. 잠시 몸을 녹이고 나와 다시 길을 걷는데 눈발이 점점 거세어졌다.

 나와 짝이 된 보스턴 출신의 친구는 나이답지 않게 천진하고 순수해 내가 귀여운 여인으로 별명을 붙였는데 만나면 항상 재미있는 얘기 보따리를 풀어놓아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었다. 미국에 의사인 아들을 두고 혼자 한국에 나와 살고 있으며 오십 중반부터 킥복싱에 심취해 주변사람을 놀라게 하는 친구였다.

 방향을 잃고 콘도 가는 길을 물어물어 걷는데 그녀는 오히려 길을 잃은 게 더 낭만적이라며 즐거워했다. 대학시절 디자인 전공이었던 그녀는 원래 문학소녀였단다. 여고시절 국어선생님의 영향을 받아 문예창작과를 지원했는데 두 번이나 낙방을 해 미대에 가게 되었다고 했다. 평소에 함께 대화를 해 보면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해 놀란 적이 많았는데 그녀의 지난 시절 얘기를 듣고 보니 이해가 되었다.

 


 한 시간 넘게 눈길을 걷다보니 우리는 거의 눈사람이 되어 있었다. 약간 겁이나 지나가는 차를 세웠는데 어느 맘 좋은 아저씨가 우릴 태워주었고 오래지 않아 콘도에 당도할 수 있었다. 그녀는 오늘 나와 눈길을 헤맨 시간 참 행복했다고 거듭 말했다. 눈길을 걸으며 대학시절 심취했던 이문열 선생의 “젊은 날의 초상”이란 작품이 떠올랐고 그 작품의 주인공이  된 느낌이었다. 오랜만에 젊은 날의 감성이 되살아났고 내면 깊숙이 알 수 없는 정열 같은 게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걸 느꼈다. 전혀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다. 불현듯 러시아 여행을 떠나고 싶었고 다시금 책속에 빠져 살고 싶었다. 이번 여행이 준 예기치 않은 선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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