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준기 (충북학생교육문화원장)

 참 묘한 일이다.
많은 사람들이 ‘막장’ 드라마라고 그렇게 혀를 차는데도 시청률은 50%에 육박한다. 주말 말고는 TV 드라마를 접할 기회가 적은 샐러리맨들이 주말엔 TV를 지키고 있어서일까?
아니면 작가의 극본이나 연출자의 연출 솜씨가 뛰어나서일까? 그도 아니면 출연자들의 연기력이 특출하기 때문일까?
어느 TV의 주말 드라마 ‘왕가네 식구들’에 대한 궁금증들이다.
말도 안 되는 스토리 전개에, 이리 얽히고 저리 얽혀 도저히 실제상황으로는 가정하기 어려운 내용이 많은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가족의 가훈이 ‘입장 바꿔 생각하자’이다.
거실 벽에 붙어 있고 간간이 대사 중간에도 등장하는 이 가훈은, 어쩌면 이 시대를 향한 작가의 강한 외침인지도 모른다.
남과 처지를 바꾸어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역지사지(易地思之).
드라마를 통해 이 역지사지의 의미를 세상에 전달하려는 ‘인기작가’의 깊은 뜻을 ‘아둔한’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남들이 200~300년씩 걸려 이룬 민주주의를 불과 반세기도 안 되어 이룬 우리는, 지금 섣부른 민주주의에 체(滯)해 있고, 취(醉)해 있다.
웬만한 약이나 치료방법으로는 치유되기 힘든 만성 체증이다.
우리 문화원이 운영하는 ‘학생’ 수영장이 있다.
글자 그대로 선수육성을 위한 학생들의 수영 훈련 장소이다. 하지만 학생들이 이용하지 않는 시간에는 주민복지 차원에서 일반에 개방하여 많은 시민들이 이용하고 있다. 이용하는 주민들은 깨끗한 수질과 청결한 시설관리에 매우 고마워한다.
그런데 여기에도 민주주의에 체한 ‘민주시민’이 있다. 학생들의 훈련 시간에도 일반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라는 것이다.
그냥 하는 요구가 아니다. 전화 받는 여성공무원에게 폭언에 모욕적인 언사를 퍼부어 여성공무원을 울리고 만다.
맞대응을 하게 되면 일은 커지게 되고 결국은 민원(?) 처리를 잘못했다고 질책 받을 게 뻔 하므로, 이 여성공무원은 공무원이 된 걸 후회하면서 눈물로 하루를 보냈다.
민주주의를 더욱 꽃피우기 위해 지방의 일꾼을 뽑자는 지방선거가 몇 달 앞으로 다가 왔다.
거리 곳곳에는 선거를 실감케 하는 홍보 플래카드가 걸려 있고, 주요 ‘명당자리’에는 대형 현수막도 걸려 있다.
이처럼 자신들의 잔치를 위한 준비는 요란하지만 정작 ‘주인’들은 무관심하다.
시내에 나가면 맘에 들지도 않는 후보가 악수를 청하는데 손을 안 내밀 수도 없고 난감하다.   
‘주인’들의 무관심과 충직한 ‘머슴’이 되겠다는 진정성이 의심되는 언어의 난무 속에, 바람인지 지지인지 어쨌든 선량(選良)들은 뽑힌다.
한쪽은 승리에 취해 만세를 부르고, 한쪽은 패배의 늪에 빠져 통음(痛飮)의 나날을 보낼 것이다.
이때부터 필요한 것이 역지사지일진대 대부분의 ‘머슴’들은 금방 잊는다.
내가 언제 머슴노릇 한다고 했느냐며 주인 행세를 한다. 주인도 그냥 주인이 아니다. 꽝꽝 거리고 호통도 친다.
진짜 주인이, “속았다”며 땅을 친들 이미 때는 늦었다.
이 가짜 주인을 몰아내고 진짜 머슴으로 부리려면 또 4년이란 긴 세월을 보내야 한다.
선거가 있기 전 앞으로 서너 달 동안은 우리가 ‘주인’ 대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붓 뚜껑을 잘못 누르는 순간 우리는 ‘머슴’이 되고 만다. 어디 한두 번 속았는가!
정말, 정말 잘 골라야 된다.
교사가 학생을, 고용주가 노동자를, 선량이 민초를, 그리고 폭언하는 ‘민주시민’이 나약한 ‘여성공무원’을 생각하는 역지사지.
‘왕가네 식구들’의 왕봉 교감 댁 거실에는 “입장 바꿔 생각하자”란 가훈은 이번 주말에도 걸려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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