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일 새벽 ‘피겨 여왕’ 김연아가 돌아왔다. 러시아 소치에서 벌어진 피겨 여자 싱글 쇼트프로그램에서 무결점의, 완벽한 연기를 선보이며 그는 74.92점으로 1위에 올랐다. 여타의 선수보다 점프는 높았고, 도약거리는 길었다. 그럼에도 착지(landing)은 깃털처럼 가벼웠다. 피겨 전설 미셸 콴은 “숨이 멎은 것 같다”고 표현했다. 외신들은 ‘부드러움의 극치’, ‘완벽’, ‘소름 돋는 연기’라는 말로 긴 공백 끝 마지막 무대에 선 그에게 경탄을 보냈다. 한마디로 환상적 완벽(fantastic perfect), 그 자체였다.
그랬다. 피겨 선수들이 있었고, 잘 하는 선수들이 있었고, 최고 레벨의 선수들이 있었고… 그리고 김연아가 있었다.
그러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흠결은 판정에서 나타났다. 롱엣지(wrong edge-잘못된 스케이트 날로 도약)나 언더로테(under rotation-점프의 회전수 부족)는 무시되기 일쑤였고, 명백한 텃세로 보이는 유럽권 선수들에 대한 점수 퍼주기가 있었다. 상대적으로 완벽한 연기 수행능력으로 변별력을 가졌던 김연아는 손해를 보았다.
안현수가 15일 소치올림픽 쇼트트랙 1000m 결승에서 금메달을 따며 토리노 올림픽 3관왕 이후 8년 만에 ‘황제의 귀환’을 알렸다. 대부분 국민들은 축하의 박수를 보냈다. 그러나 빙상장을 돌며 환호하는 그의 손에 들려있었던 것은 태극기가 아닌 러시아 국기였다. 진심어린 축하를 보내면서도 내심 서운한 감정이 들수밖에 없었다.
빙상연맹을 두고 ‘빙신연맹’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한체대와 비한체대로 나뉘는 고질적인 파벌주의와 빙상계 권력을 독점한 이에 의한 독단과 전횡으로 안현수를 러시아에 빼았겼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느 줄에 서느냐에 따라 국가대표가 결정되는 비정상적인 행태들이 도마 위에 오른 것도 벌써 여러 해. 그런데 하필이면 왜 지금 이때에 ‘안현수 문제’로 여론이 들끓고 있는 지도 한 번 생각해봄직하다. 그동안 어물쩍 넘어갔던 문제가 러시아 소속 안현수 선수의 금메달로, 박근혜 대통령의 진상 조사 한마디로 ‘화들짝 재조명’되는 1등 지상주의 모습 또한 블랙코미디이기 때문이다.
섹티즘(Sectism·파당주의)이 문제가 된 것은 이번 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각 분야에 관행처럼 뿌리내리고 있다. 섹티즘이 지닌 가장 큰 병폐는 공정한 게임의 룰을 근본부터 파괴한다는 데 있다. 소치 올림픽에서 나타난 두 가지 팩트(fact), ‘김연아와 안현수 문제’를 통해 우리는 섹티즘이 ‘공정한 룰’을 어떻게 파괴하는 지를 볼 수 있다. 학연, 지연, 혈연으로 똘똘 뭉친 패거리문화가 어찌 빙상계 한 곳에만 국한돼 있겠는가.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역감정을 조장했던 부산 초원복집 사건이 정치판에서, 재벌 총수들이 아들에게 자회사를 차려주고 골목상권까지 죽여가며 뒤를 봐주는 일이 경제계에서, 특정 학교 출신이 아니면 주류가 될 수 없는 불합리한 일이 예술 문화계 등에서 일어난다. 그것으로 우리는 종종 좌절을 경험한다. 반면교사로 삼자. 좌절을 극복하는 방법은 한가지다. 나부터 패거리문화를 온 몸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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