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은순(문학평론가)

 갤러리에서 일을 하다 보니 화가들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문학동네 사람인지라 화가들을 만나면 동병상린의 감정과 친근감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어느 날 우연히 친구를 통해 사십대 초반의 ‘에밀리’라는 화가를 소개 받게 되었다. 지적인 외모의 그녀는 명문대에서 스페인 문학을 전공한 뒤 대기업에 입사해 일을 하다 뜻한 바 있어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온 재원이었다. 현재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그녀와 식사를 하며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상당히 이지적이고 주관이 뚜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모처럼 마음 통하는 친구를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또 다시 그녀와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고 그녀와 같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다른 화가 두 사람을 소개받게 되었다. 처음 만났음에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것처럼 편했고 모처럼 영혼의 벗을 만난 느낌마저 들었다. 그중 이재삼이라는 강원도 출신의 화가는 양평에 작업실을 두고 목탄으로 달빛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데 언제 시간 내서 한번 놀러오라고 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인사치레로 받아들였을 터이지만 달빛에 관해 예사롭지 않은 철학과 신념을 가진 그가 범상치 않은 내공의 소유자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았고 어느 날 지난 번 멤버들과 의기투합해 양평엘 가게 되었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 근처에서 만난 우리는 달빛 화가의 빨간색 스포츠카를 타고 양평으로 향했다. 어디를 가는지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함께 가는지도 상당히 중요한 터, 모처럼 화가들과 봄나들이를 가는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일부러 강변을 따라 운전을 하며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해 주려는 화가의 마음이 유난히 따뜻하게 다가왔다.

 한 시간 남짓 차를 달려 양평 작업실에 도착했는데 작업실 앞 개천너머로 작은 마을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작업실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고 거의 개인 갤러리라고 해야 맞을 것 같았다. 작품들이 거의 수 백호에 달하는 대작들이라 크나큰 감동을 넘어 전율마져 느낄 지경이었다. 오로지 목탄으로만 작업을 하는 그는 달빛에 비친 풍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극도로 정밀하고 섬세하기 이를 데 없었다. 깊은 철학과 심미안의 소유자가 아니면 그릴 수 없는 범상치 않은 작품들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대나무 숲, 고목, 매화, 폭포수, 옥수수밭 등 다양한 자연을 소재로 그린 거대한 목탄화들은 소란스런 현실과 동떨어진 아득한 신화의 세계인듯 신령스런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까운 읍내식당에서 북한식 회령 만두국을 먹었는데 조미료를 쓰지 않고 천연의 맛이 살아있어 주인장의 철학이 느껴졌다. 모두 어린애처럼 담백하고 맛있다는 감탄사를 연발하며 맛난 점심을 먹고 이번에는 화가의 이웃인 조각가 이재효 선생의 작업실에 들렀다. 화가보다 몇 살 어린 조각가의 작업실은 거의 공장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규모가 어마어마했다.

 작업실에 도착하기 전, 대중성과 작품성을 동시에 간직하고 있는 작품을 하는 작가라는 설명을 듣고 도대체 어떤 작품이길래 그럴까 싶었는데 막상 가보니 그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멋진 외국호텔 로비에서 보았음직한 친숙한 느낌의 작품들이었고 나무와 못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을 하나만 가져다 놓아도 그 공간이 훨씬 격조 있게 바뀔 것 같았다.

  조각가는 한국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명하다고 했고 세계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져 각국에서 초청해 작품을 의뢰할 정도라고 했다. 실제로 조각가는 며칠 뒤 멕시코로 떠나는데 한 멕시코 부호의 정원에 작품을 설치해 주러 간다고 했다. 작품 크기가 커서 두 달 정도 그곳에서 머물며 작품을 마무리하고 설치해야 한다고 했다. 겸손하고 소박한 그에게서 전혀 유명인의 거만함 같은 게 느껴지질 않아 더욱 감동적이었다.

 모처럼 오롯이 예술에 정진하는 작가들을 만나고 보니 영혼이 맑아진 느낌이 들었고 다시 서울로 나온 우리 일행은 한남동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만남의 말미를 장식했다. 우연히 만나 친구가 된 우리 네 사람은 마치 유년기를 함께 한 친구들처럼 막역함을 느꼈다. 참 아름다운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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