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천호 목사의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십자가를 진 신석구’

신석구는 개종과 함께 전도를 결심하였다. 그는 34세의 비교적 늦은 나이에 1908년 3월 29일 주일에 개성 남부교회에서 선교사 왓슨에게 세례를 받았고, 그해 4월부터 감리교 협성성경신학원에서 신학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협성신학원은 지금은 감리교 신학대학교의 전신으로 당시에는 서울, 평양, 개성, 인천 등지로 순회하며 농한기를 기해 1년에 2~3달씩 집중교육을 하고 있었다. 신석구는 잦은 교회 이동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14년 만인 1922년에서야 졸업하게 되었다.
신학생이 된 그는 1908년 7월 5일부터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그가 처음 접한 교회 일이었다. 개성 남부교회 전도사로 있는 홍종숙의 소개로 1909년 2월 1일부터 개성 북부교회에서 전도를 시작하였고, 5월 19일 열린 구역회에서 정식으로 권사 직첩을 받았다. 당시 권사는 평신도에 속하지만, 설교권이 주어지는 ‘준 목회자’로 선교사가 없을 때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개성 북부교회 권사로 처음에는 새 신자를 심방하는 일을 하였다. 1908년에는 크램 선교사가 안식년을 휴가를 받아 미국으로 들어가고, 캠블 선교사가 담임자로 왔지만, 한국어가 서툴러 교인 수가 800명에 이르는 남부교회 일을 전적으로 맡아보게 되었다.
신석구가 처음 전도사로 추천받은 것은 1910년이다. 9월 16일부터 21일까지 개성 한영서원 기숙사에서 열린 남감리회 한국선교회 매년회 때 지방회에서 정식 전도사로 추천을 받았다. 그런데 그해에 전도사 한사람이 금전적인 문제로 면직을 당한 일이 있어서 전도사들의 부채 관계를 철저하게 검증하는 분위기였다. 신석구는 부채가 있어서 권사 직접을 받을 때에도 이 문제로 기도하였을 정도로 그에게 큰 부담이어서 불리한 상황이었다. 자격심사위원들은 예상대로 질문하였다.
“부채는 없습니까?”
신석구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60원의 부채가 남아 있습니다.”
연회 마지막 날 신임전도사의 명단에 그의 이름은 빠져있었다. 그는 자서전에서 “폐회하는 그 자리에서 떨어졌다는 말을 들으니 큰 죄를 지은 것 같았고, 동서양의 사람들 수백 명이 모인 이 자리에서 이 광경을 당하니 생전에 처음 보는 부끄러움이었다. 폐회하고 층계에서 내려올 때에 마음에 분노가 떠올랐다. 오! 예수님도 돈이 있어야 믿겠구나.”라고 말하고 있다.
전도사 면접에서 떨어져 분노가 치민 마음으로 돌아섰지만, 집에 가까이 올 무렵 그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아직 전도사 될 자격이 없어서 떨어진 것이다. 만일 내가 전도사 자격이 될 만하면 하나님께서 부채도 갚아 주셨을 것이다.” 그는 집에 돌아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주님은 높은 데서 낮은 자리로 내려오셨어도 불평하지 않았는데, 나는 권사에서 전도사로 한 계급 올라가지 못했다고 불평하고 있으니 전도사가 되었으면 얼마나 교만해졌겠는가? 교만한 마음을 가지면 사람이 보기에는 올라간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떨어진 자가 된 것이 아니냐?” 그는 교만의 죄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 앞에 아까보다 더 큰 수치를 느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여 교만을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함을 고백하였다. 이 체험을 통하여 겸손의 은혜를 깨달아 남보다 높은 곳에 이르는 것은 교만과 타락으로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신석구는 훗날 자서전을 쓰면서 “젊은 청년 목회자들이 너무 속히 올라가다가 타락하는 것을 종종 보았다” 고 말하고 있다. 전도사 면접에서 떨어진 것이 목회자로 더 성숙한 길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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