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부 부국장

정치는 귀결하면 신의(信義)요, 보은(報恩)의 실천이다.
정치인이나 정치집단의 신념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기대를 흔들림없이 지키는 것이며, 실천함으로써 약속을 이행하는 것이 정치의 근간이자 본질이다.
음성 출신의 조선시대 문신인 반석평은 원래 노비였으나, 성실하고 총명한 그를 기특히 여긴 주인이 노비문서를 없앤 뒤 친척 집 양자로 보내 과거에 급제할 수 있었다.
그가 형조판서에 올랐을 때, 우연히 거지 차림의 옛 주인집 아들을 만난 뒤 임금을 찾아가 자신이 옛 주인의 은혜를 입어 노비 신분을 숨기고 관직에 올랐다며, 벌을 받는 대신 옛 주인의 아들에게 관직을 내려달라고 청했다.
이에 감동한 임금은 반석평의 관직을 유지하고, 옛 주인의 아들에게도 관직을 내렸다고 한다.
조선시대 실학자인 이익은 그의 행동을 평가하며 “이와 같이 한다면 세상 풍속이 어찌 분발하지 않겠으며, 재주 있고 덕 있는 자가 어찌 감동되지 않겠는가”라고 교훈했다.
요즘 ‘새정치’를 표방하고 나선 안철수 의원의 정치적 행보가 세간의 화제다.
구태정치를 타파, 새로운 정치질서를 만들어가겠다는 그에게 많은 국민이 지지와 기대를 보내면서 한 순간에 한국정치의 한 축으로 우뚝 섰다.
하지만, 그의 정치적 행보를 보면 개인의 입지 강화를 위해 툭하면 말을 바꾸고, 정치적 궤변으로 합리화하는 구태 정치를 답습하고 있다.
그는 민주당에 대해 “낡은 정치로는 아무 것도 담아낼 수 없으며, 지역주의에 안주하고 혁신을 거부하는 세력”이라고 비판했다.
새정치연합 창당을 준비하던 그가 돌연 그렇게 비판하던 민주당과 합당을 선언했다.
국민에게 약속한 기초선거 무공천에 합의했다는 것이 궁색한 합당 명분이다.
그는 특히 자신에 대한 실망과 비판에 대해 “민주당이 변하면 그것도 새정치”라는 사수(詐數?남을 속이는 꾀)로 합리화하고 있다.
지지도가 떨어지고 새정치에 합류할 인물난을 겪다보니 불가피한 굴종이며 투항에 불과함에도.
안 의원은 경영자 시절, “나의 경영철학은 조직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기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은 쪽으로 판단하고 일을 진척시켜 나가는 것이야말로 참된 성공에 이르는 길”이라고 말들로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대변했다.
안 의원의 선택이 그의 말을 지켰는가. 단언컨대 결코 그렇지 않다.
아니, 그에게 정치적 철학이나 가치관이나 신념 따윈 애초부터 정립조차 되지 않았을 터.
그런 그에게 새정치를 기대하고 지지한 국민의 실망과 절망은 무엇으로 보상받아야 하는가.
한국갤럽이 4~6일 19세 이상 남녀 1017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 ±3.1%p) 결과, 응답자의 49%가 안 의원에 대해 ‘새정치가 아니다’라고 답했다.
의견을 유보한 19%를 포함하면 응답자의 70% 가량이 새정치가 아니거나, 새정치로 보기 어렵다고 답한 셈이다.
기존 정치와 구분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나, 실천 강령, 정치적 신념이 무엇인지조차 명쾌하진 않은 ‘새정치 실체’에 대한 국민의 냉철한 판단이다.
반석평이 그토록 갈망해 얻은 명예와 실리와 가치를 모두 내려놓으려 한 용기있고 감동스러운 행동이 바로 신념과 철학의 발로다.
자신을 믿고 지지해준 옛 주인을 위해, 그의 믿음과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
정치 또한 국민의 믿음과 지지에 보답하기 위해 모든 명예와 실리와 가치를 내려놓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과 감동이 필요하다.
그것이 새 정치다. 안 의원이 말하는 새정치와는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연하게 다른.
거듭 단언컨대, 안 의원은 그리 머지않은 때 민주당과 합당을 파기하고 ‘또 다른 새정치’를 말하게 될 것이다.
얻고자 하는 것을, 가지려 하는 것을 얻지도 가지지도 못할 것이기에.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새정치 선언이 아니라, 앞서 말한 이익의 교훈부터 깊이 깨닫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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