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범 지강헌이 19881015일 서울 북가좌동 주택가에서 인질극을 벌이다 자살하기 전 경찰에게 마지막으로 요청을 한 것은 비지스의 할리데이를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스콜피언즈의 할리데이를 들었다는데, 그가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흉악범과 비교되는 그의 감성이 아니라 돈 있는 사람은 무죄가 되고 돈 없는 사람은 유죄가 되는, 자본주의와 법의 불공정성에 대한 절규, ‘무전유죄, 유전무죄때문이었다.

월세와 세금 70만원을 남기고 세상을 등진 서울 송파 세 모녀 자살사건은 우리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사회의 무관심을 보여주는 것이었기에 안타까움은 더했다. ‘뒷북치듯 여러 제도를 보완한다고들 하는데, 효과는 의문스럽다. 따지고 보면 모두 으로부터 출발된 비극들이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가 배태하고 있던 우리들의 일그러진 자화상이다.

허재호 전 대주그룹 회장이 24일 일당 5억원짜리 황제 노역을 시작했다고 한다. ‘환형유치(換刑留置)제도에 따른 것이다. 이 제도는 벌금을 내지 않은 범죄자에게 교도소에서 노역으로 대신하도록 하는 것으로, 노역 일당은 보통 510만원 선이며, 노역 기간은 3년을 넘길 수 없다.

서민들에게 셈해주는 5만원의 1만배를 받으며 허씨가 하는 노역은 종이 쇼핑백에 풀을 붙이는 것이라고 한다. 그가 하루에 종이쇼핑백 100개를 만든다고 하면 1개당 5000만원의 노동력이 들어가는 셈이다.

국민들은 위화감을 넘어 절망을 느낀다. 생계형 벌금을 노역 일당 5만원으로 꼬박꼬박 갚아 나아가야 할 서민들에게 일당 5억원의 황제노역은 감이 제대로 오지 않는다. 벌금 254억원을 갚는데 50일이면 된다는 이야기다.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이런 황당한 판결은 장병우 현 광주지법원장이 내렸다. 29년의 재직 기간 중 대부분을 광주에서 근무한 향판(鄕判)’인 그에게 국민들은 유착을 의심하고 있다.

이는 명백히 헌법상 평등원칙에 위배되는 일이다.

뉴질랜드로 도피해 호화생활을 즐겼던 먹튀 회장에게 재판부와 검찰은 편안한 길을 열어주었다. 광주지검은 508억의 세금 탈세와 100억 횡령 폄의로 허 회장을 기소한 뒤 징역5년에 벌금 1000억을 구형하면서도 이례적으로 벌금을 선고유예해달라 요청했다. 광주지법은 징역3년에 집유5, 벌금 508억을 선고했고, 광주고법은 징역26월에 집유4, 벌금 254억을 선고했다. 갈수록 절반 가까이 뚝뚝 깎아준 것이다. 죄질이 나쁜 탈세에 횡령인데, 이래서야 국민이 사법부를 믿을 수 있겠는가.

뒤늦게 대법원이 환형유치제도 개선에 나선다고 한다. 그렇다고 뚜렷한 개선 방안을 제시한 것도 아니다. 개선된다 해도 허 회장의 황제노역은 유효한 일이 된다. 국민들은 이제 절망을 딛고 분노하고 있다. 그 힘으로 사회적 저항을 이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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